여름, 물놀이의 계절
바야흐로 여름이다. 덥고 습하고 끈적끈적하고 찝찝하다. 이 세 가지 느낌을 제주에서는 '치닥치닥하다'고 하는데 요즘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다. 더위를 피한다는 피서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친정에 간 김에 이른 휴가 기분을 냈다. 여름휴가란 모름지기 물놀이 정도는 해주어야 제 맛일 터.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나는 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을 두려워하고 물이 살에 닿는 감촉을 낯설어하고 눈앞에서 일렁이는 물살을 불편해하는 것과 별개로 바다 혹은 수영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역동성, 자유로움, 편안함에 대해 동경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혼여행으로 체코+헝가리 혹은 하와이 두 후보지를 두고 고심한 끝에 하와이를 선택했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남편은 하와이가 제주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해 동유럽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으나 계절이 겨울이라는 점, 난민과 테러 문제로 여행하기에 안전하지 않은 분위기였다는 점 등을 감안했을 때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이런 이유들로 남편은 첫 해외여행이자 신혼여행지인 하와이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없었지만 하와이 땅에 발을 들이자마자 소락소락한(물건 따위가 습기 없이 잘 말라서 감촉이 좋다는 제주 방언) 하와이의 날씨 매력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내리쬐는 태양볕은 강렬하지만 불어오는 바람은 보송보송했던 것이다. 무겁고 눅눅한 제주의 여름 바람과 달리.
하와이가 바다의 도시인만큼 물에서 즐길 수 있는 활동들이 무궁무진했다. 가장 쉽게는 호텔 인피니티 풀장에서 물놀이는 하는 것부터 스노클링, 서핑, 요트 타기 등 골라할 수도, 모두 다 즐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물을 무서워하는 내가 문제였다. 수영을 못하는 것도 모자라 파도가 출렁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물멀미'를 하는 탓에 어떤 활동이든 시작은 함께였으나 끝에는 남편 혼자 남았다. 나는 모래밭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남편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내가 심심할까 봐 예정보다 일찍 일정을 마무리했다. 물속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이고 물 위에 둥둥 떠서 오후의 햇살을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시원하고 평화로울까? 이놈에 몸뚱이로는 잘할 수 있는 게 없다. 달리기도, 춤도, 수영 조차도.
아이는 나의 성향을 많이 닮았다.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성이 있다. 달리 말하면 새로운 일에 소극적이고 겁이 많다. 어린아이, 특히 어린 아들을 키울 때는 아이들이 겁 없이 뛰어다는 통에 늘 부상이 걱정인데 남자아이 치고는 차분한 기질 덕분에 육아를 하는 데 있어 조금 수월한 편이었다. 그런데 물을 싫어하는 것까지 나를 닮은 건 솔직히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머리에서 물이 얼굴로 타고 내려오는 감촉을 불편해해서 머리를 감기는 게 늘 어려운 과제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편이 아이를 무릎에 안아 감기거나, 내가 감길 때에는 샤워캡을 씌워야만 머리를 감길 수 있었다. 바닷가를 놀러 가도 물속 대신 주로 모래밭에서만 놀고 수영장이 있는 리조트에 가도 키즈카페나 놀이터에서 놀기 일쑤였다. 다양한 체험을 하면 좋을 테지만 '엄마 성향이 그러하니 아이도 어쩔 수 없는가 보다' 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여섯 살이 되자 아이가 달라졌다. 지난 며칠간 마주한 아이는 계곡에 가서 옷이 젖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물고기를 잡겠다며 물살을 따라 오르기도 하고, 물이 찰랑이는 엑스포 광장에서 신나게 킥보드를 탈 줄 아는 아이였다. 수영장에서 물장구를 치고 생전 처음 잠수(비록 얼굴만 담그는 수준이었을지라도)에 도전하며 물에 뜨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 혼자서 고군분투할 줄 아는 아이였다. 점심도 먹지 않고 4시간을 내리 물놀이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아이였다. 내일도 또 풀장에 오면 좋겠다고 말하는 아이였다. 아이는 달라진 게 아니라 성장하고 있는 것일 테다. 이번 여름에는 더 많이 바닷가를 찾고 아이에게 '위험해!, 안돼!, 이건 네가 좋아하지 않는 거야.'라는 말은 덜 해야지!
시처럼 아름답고 꽃처럼 어여쁘기만 한 세상이 아니라고 해서 캥거루처럼 배주머니에 아이를 품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품 안에 자식'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다. 이제는 내 가슴팍에 머리가 닿고, 품에 안으면 다리가 저만큼 뻗어 있다. 아이가 자라면 자라는 만큼 자기 만의 세상에 한 발 더 깊게 발을 담근다. 우리는 흔히 아이에게 '너는 누굴 닮아 그러니?' 혹은 '애가 나를 닮아서~'라는 말을 하며 쉽게 아이에게 부모의 모습을 투영한다. 하지만 아이는 누구를 닮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아이 자신으로 살아가야 하기에 부모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이면 충분하다.
- 엄마, 잠수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줄까? 하나도 무섭지 않아, 쉬워.
물 밖에 서 있는 내게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아이가 손을 내민다. 아이의 손을 잡고 물속으로 몸을 담그며 생각했다. 계속해서 부모의 세계에 아이를 머물게 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나 자신을 경계하자고 말이다. 아이는 이미 알에서 나오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데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