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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달달 May 22. 2023

공부하라는 것도 아닌데!

학원 다니기 싫다는 아이, 부모의 선택은?

- 엄마, 나 학원 그만 다니고 싶어요.
- 갑자기? 왜 무슨 일 있어?
- 아니, 그냥 다니기가 싫어.
일곱 살(만 6세. 만 나이가 아직은 어색해서 기존 나이셈 대로 표기함) 아이는 화요일과 목요일에 각각 수영과 미술학원에 다니고 있다. 둘 다 주 1회 수업으로 수영은 15만 원, 미술은 13만 5천 원의 수강료를 내고 있는데 합치면 30만 원 가까이 되는 돈이니 적지 않다. 대신 공부 관련 학원은 다니지 않아 '엄마 선생님'인 내가 틈틈이 봐주고 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자기 자식을 '잘' 가르칠 수 있는 부모가 몇 이나 될까. 한글과 수학도 학원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아이가 원하지 않는다. 사실 수영과 미술을 시작하게 된 것도 순전히 내 욕심이었다. 물에 빠졌을 때 제 몸 하나 감당할 수 있도록 수영은 기본으로 가르치고 싶었고, 미술은 아이 정서 발달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말이 거창해 가족회의지 실상은 ‘모여봐, 할 이야기가 있어.’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그냥 다니기 싫다고 했지만 얘기를 하다 보니 속내는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수영은 동작 하나를 힘들게 배워서 익숙해지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또 연습을 해서 자연스러워지면 또 새로운 걸 배우다 보니 힘이 든단다. 그리고 미술은 만들기는 괜찮은데 그림 그리는 건 잘하지 못해서 하기가 싫단다. 학원 다니기 싫은 진짜 이유가 그냥이었다면 나도 똑같이 그냥 다니라고 했을 테지만 아이에게는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자신의 속마음을 말했으니 그다음은 오롯이 부모가 고민할 몫만 남았다. 아이의 의견을 100% 수용할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 아니면 타협할 것인가?

돌이켜보면 내 어린 시절은 어른들로부터 받는 무시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분이 울적하다고 하면 ‘쪼꼬만 게 울적할 일이 뭐가 있냐’하고, 공부하기 힘들다고 하면 ‘네가 밥을 하냐 빨래를 하냐 책가방 매고 학교만 다니면 되는데 뭐가 힘드냐’ 소리를 들어야 했다. 또 궁금한 게 생겨 물어보면(이를 테면 뉴스에 양복에 금색 배지를 단 어른들이 왜 싸우는지?) ‘애들은 몰라도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이가 어려도 친구와 싸우면 기분이 우울하고, 공부는 하는데 성적이 안 나오면 몸도 마음도 힘이 들며, 어른이 돼서 양복까지 입고 싸울 일이란 대체 무엇인지 궁금할 수 있다는 걸 우리 부모님은 정말로 몰랐을까? 무엇보다 애석한 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짜장면 먹을지 짬뽕 먹을지조차 식구들끼리 메뉴를 통일해야 했다. 이것저것 시키면 주방장이 싫어한다는 게 이유였는데 딸의 마음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부모님이라니(가히 생활밀착형 이타주의라 할 수 있겠다).

요즘의 젊은 부모들은 80-90년대 경제 부흥기에 태어나 민주주의를 경험한 X세대들로, 부모 세대보다 더 많이 배우고 폭넓은 경험을 하며 통제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우리네 부모 세대와 달리, 이들은 친근하고 친구 같은 부모를 지향하면서 자녀들과 대화를 많이 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안다. 존중받지 못했던 내 어린 시절의 쓴 기억은 뒤로 하고 나 역시도 아이와 관련된 문제는 대화가 먼저이다. 학원을 시작할 때 그랬던 것처럼 그만 둘 때도 아이와 대화 시간이 필요했고 대화를 한 것까지도 좋았다, 아이의 마음을 알 수 있었으니.

고민의 핵심은 이럴 때 부모가 아이의 의견을 수용해 주어야 하는지 여부이다. 학원에 다니기 싫다는 아이를 억지로 보낼 것인가, 아니면 그만두게 할 것인가? 힘들다는 아이의 말만 듣고 ‘그래, 힘들면 그만둬도 괜찮아.’라고 하는 게 맞나? 앞으로 힘들 때마다, 하기 싫을 때마다 극복하지 못하고 그만두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의지력이 부족한 아이로 자라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억지로 보내면 돈만 날리는 것 같은데...... 먹이 사슬처럼 끊이지 않는 생각의 사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요즘 주변 일곱 살 아이들을 보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한글, 수학, 영어 학원은 기본이다. 태권도나 피아노 같은 예체능 1-2개를 추가해서 주중뿐만 아니라 주말에도 학원에 가는 아이들이 많다. 그런데 내 아이는 일주일에 이틀도 가기 싫다고 하니 솔직히 엄마로서는 맥이 빠지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공부 하라는 것도 아닌데!

상의 끝에 수영은 발차기, 호흡 등 배움이 단계적으로 이어져있어 중도에 그만 두면 다음에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계속 다니고, 미술은 재능이 있거나 흥미를 느끼는 게 아니니 중단하기로 했다. 대화보다는 설득의 시간이었지만 생각 끝에 아이가 알겠다고 했다. 서로 한 발씩 물러섬으로 원만한 합의에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항상 부모의 권위는 지키면서 아이의 의견이 수용되는 이상적인 결말을 맺는 것은 아니다. 마트에서 울고 떼쓰는 아이를 둘러업고 나온 적이 여러 번 있었고(아이의 패배), 일곱 살이 되면서 태블릿으로 할 수 있는 게임을 허락해 줬다(부모의 패배). 협상 테이블은 회사에서 연봉 협상 할 때 이외에도 가정에서 수시로 펼쳐진다.

우리 부부는 아이와의 협상에 있어 엄격과 허용에 관한 몇 가지 기준을 정했다. 엄격의 잣대는 크게 세 가지 영역에 적용되는데 먼저 사회적 규범에 관한 사항이다. 이를 테면 쓰레기 함부로 버리지 않기, 무단횡단 하지 않기, 원우들을 때리지 않기,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기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어른들께 인사하기, 선생님 지도에 잘 따르기 같은 기본예절, 마지막으로는 잠들기 전 양치, 밥 먹은 그릇 싱크대에 놓기, 게임은 하루 1시간 등 가정 내 생활 규칙이다. 특히 사회적 규범과 기본예절에 있어서는 타협점이 없다. 나머지는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는 편이다(먹고 싶은 음식이라면 더욱). 단, 무조건적 수용 대신 서로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더 좋은 대안을 찾는다는 조건이 붙는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아이를 더 잘 키울 수 있을지 고심하고, 우리가 맞는지, 잘하고 있는지, 의심하고 고뇌하는 평범한 부모이다. 학원 하나 다니고 말고가 그렇게 대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아이가 부모와 함께 의사결정을 하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본다. 자기의 주장을 펼쳐야 할 때와 상대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할 때를 아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은 경험치가 쌓이다 보면 종국에 아이는 자신의 삶에 필요한 가치관을 스스로 정립할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또한 선택의 순간마다 충동적이기보다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동심리를 전공한 전문가도 아니고, 오은영 박사님은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옳다고 믿는 육아의 방법들이 정답인지 오답인지 모른다. 다만 육아의 최종 목표인 아이의 자립 및 독립을 위한 모범 답안을 찾기 위해 매일 하루 치의 최선을 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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