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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꿈이 뭐니?"

글쎄요??

by 아이리스 H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번지면서 일상을 바꿔 놓은지도 여러 달이 지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차분하게 마스크만을 의지한 채 베트남 하노이에서 살아남기 하는 중이다. 잠잠할 듯하다가 또 번지고 괜찮아질 듯하다가 또 위험단계가 왔다 갔다. 도무지 어떤 상황인지? 알 수가 없다.


한국을 오고 가는 항공편도 자유롭지 않고 호텔 격리수용에 특별기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다 보니 한국으로 가는 것도 망설여진다. 그렇다고 이곳도 그리 안전지대는 아니다. 코로나 검사도 믿을 수 없을뿐더러 외국인 특히 한국인들을 수용할 병원시설 열악하다. 무조건 개인위생과 조심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오늘은 작은아들에 대한 추억을 더듬어 가 보려 한다.


바닷가에 소복을 입고

걸어가는 한 여인이 있었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더니

하늘에 오색 무지개가 떴다.

여인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여인은 소복 치마를 넓게 펼쳐 별들을 받으려 했다.

별들이 쏟아져 들어왔건만 치마 안에 별들은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여인은 별 받기를 포기하려는데... 갑자기 어마어마한 큰 별이 여인 앞으로 떨어졌다.

화들짝 놀랜 여인은 감당할 수 없는 큰 별을 치맛폭에 받고는 쓰러졌다.

잠에서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 후, 둘째가 임신되었고 그 꿈은 태몽이었다. 하지만 둘째를 갖는 것이 부담이 되었고, 포기하고 싶어 산부인과에 상담을 갔다. 의사 선생님은 큰아이와 터울도 2년이고 자리도 잘 잡았고 일을 병행하면서도 둘은 충분히 키울 수 있다고 하시며 나를 설득하셨다.


' 예쁜 딸이면 좋겠다'마음속으로 소망하며 열 달을 품었다.

자연분만을 시도했으나 응급상황이 발생하면서 수술대에 올랐고 생사를 오고 갈 만큼 나와 둘째는 위험했다.

아마도 꿈에 보였던 하얀 소복 때문인지? 찜찜했지만 큰 별을 받아냈으니 우리는 살아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마취가 풀리고 나도 살아났고 둘째도 겨우 2.6킬로 그램의 몸으로 극적으로 살아났다. 그날 첫눈이 왔다.


그렇게 작고 여린 몸으로 나에게 와준 둘째는 무럭무럭 자랐고 특별히 아픈 곳 없이 컸다.

원했던 딸은 아니지만 두 살 터울 형아와 의좋은 형제로 낳길 참 잘했다 싶었다.



7살까지 형과 내가 읽어주는 동화책을

야금야금 받아먹으며 들었던 동화내용도

줄줄줄 말하는 귀염둥이였다.


8살 되던 해, 학교에 입학을 해야 하는데... 한글을 잘 몰라서 학교 가기 전 6개월 동안

집중 한글을 가르쳐서 겨우 학교에 보냈다. 첫아이는 4살에 한글을 스스로 깨쳐 천재 소리를 들었는데...

둘째는 휴직을 하고 한글 공부를 시켜야만 했다. 손이 많이 가는 스타일이었다.


아쓰기 70점을 받고도 달려와 자랑하는 둘째의 해맑음은

100점을 꼬박꼬박 받아오던 큰애 와는 차이가 많았다.

그러던 중 콜팝(긴 종이컵에 아래는 콜라 그위에 작은 플라스틱 통을 올려 작은 치킨 조각을 올림) 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100점을 받으면 보상으로 콜팝을 사주기로 약속했다. 그 후, 100점보다 귀한 콜팝을 먹기 위한 필살기로 받아쓰기 백점을 받아왔다. 학습효과를 톡톡하게 보았다.


초등학교 3학년 시험지

개미와 베짱이 지문을 읽고 답하는 문제

"내가 만약 베짱이라면?" 서술형 문제 정답: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고 베짱이처럼 살지 않겠다.

아들의 답: 짜증 난다 생각만 해도... 빨간색 색연필로 쭉 그어진 시험지를 가져왔다." 왜? 틀린 거야? 엄마??"


그림을 보고 답하는 서술형 문제

놀이터에 그넷줄이 한쪽 끊어져 고장 난 그림을 보고 답하는 문제 정답: 위험하니까 타지 않는다.

아들의 답: 경비원 아저씨께 말한다. 안되면 하나님께 기도한다. 또 틀렸다

엉뚱하지만 늘 창의력이 있는 답으로 점수는 놀랄 지경이었다.


형아를 따라 태권도를 보냈더니

하얀 단복에 허리띠를 매는 게 멋지다더니... 하나, 둘, 셋, 넷 , 구령에

똑같이 팔을 펴고 접고 발차기하는 게 싫다며 엉엉 울었다.


그래도 빨간 띠까지는 억지로 다녔다.

큰아들은 품띠를 지나 검정띠가 될 때까지 태권도를 다녔지만...

작은아들은 할 수 없이 자기 맘대로 그림 그리는 학원으로 옮겼다.


형제임에도 많이 다른 개인차 인정후

교내 미술대회에서 상을 타오는 기쁨을 자주 보여 주었다.

화가가 될 듯 그림 그리기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미술학원 옆 피아노 학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느 날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한다.

그래서 피아노를 치더니 갑자기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며... 집에서도 어찌나 연습을 하던지

뚱땅뚱땅 소음이 시끄러울 정도였다. 그 후, 1년이 지나고 2년 즈음~


급기야 피아노 콩쿠르대회에 나갔다. 소나티네를 쳤다. 나비넥타이를 하고 정장에

그럴듯한 모습으로 실수 없이 피아노를 연주했고

최우수상 트로피를 받아왔다.



네 꿈은 뭐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둘째는 그렇게 성장했다.

" 네가 행복한 걸 하며 살아라. 하지만 다들 하고 싶은 것만 하고는 살 수는 없단다."

초등학교 6학년 졸업식에 국회의원상을 받았다. 반장을 해서 준듯했지만

아들은 국회의원 아저씨가 너무 멋지다며...

'나도 상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열심히 치던 피아노를 아쉽게 그만두었다.


'공부를 잘해야 꿈을 이룰 수 있을 거야.' 둘째는 그때부터 스스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학원도 가겠다고 했고 사춘기도 없이 꿈을 향해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성적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모두가 열심히 달리고 있음에 등수를 올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엄마, 다시 피아노 치고 싶어요..." 기말고사가 코앞인데..." 그래 하고 싶은걸 해야 행복한 거지..."애써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잡고 피아노 학원에 재등록을 하고 돌아오는 길 내 마음에 구멍이 났는지 찬바람이 휑~~ 불어왔다.


수학 문제를 더 풀 수도 있고 영어 단어를 백개쯤 외울 만큼의 시간이 지나서

떡꼬치를 입에 물고 들어왔던 작은아들... 새로운 곡을 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단다.

중학교 2학년인데...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큰아들은(중2) 마치고 아빠를 따라 중국으로 유학을 갔고 작은 아들과 나는 한국을 지키며

누가누가 더 잘 키우나? 내기를 건 사람처럼 아들 한 명씩을 나누어 돌보았다.



중학교 때는 각 과목당 백점에 영화표 한 장을 걸었다. 전과목 중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 3개 정도 백점을 받아왔다. 그렇게 동기부여가 되어 성적은 조금씩 올라갔다. 백점이 추가될 때마다 성취감이 높아졌고 만원의 거금도 받아갔다.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상위권으로 성적도 오르고 인기도 높아져 3년 내내 반장을 했다.


중2, 심리검사에서 자살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

눈을 감고 손을 드는데 30명쯤 아이들이 거의 손을 들었다고 한다.(슬픈 현실)

" 너는 왜? 손을 들지 않았어?" 선생님이 아들에게 묻자

"저는요 아직 안 먹어본 게 많아서요... 제가 가족여행으로 중국에 다녀왔는데 그때 배가 불러서 못 먹고 온 게 많은 데 자살하면 그걸 먹을 수 없잖아요" 했다는 것이다.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진학은 성북구에서 용산구로 멀리 보냈다. 딱 한 명의 친구와...


고1

"엄마, 나 반장 되었어.." "뭐라고?" 친구가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어떡해?"

***반장 연설***

"여러분, 왕따 없는 교실 만들고 싶어 반장 되려고 합니다. 내가 왕따 될까 봐..."

몰표였다고 한다. 친구 한 명도 반이 달랐다.

고2

"햄버거 제일 맛난 거로 쏘겠습니다." 또 반장 되었다.


고3

"역시~ 반장은 내가 해야겠지~ 뽑아줘서 고마워 친구들아~"
투표도 하기 전에 그냥 반장이 되었다는... 아들은 또 3년 내내 반장을 했다.

담임선생님도 놀랍다는 반응 "성적만 좀 더 올리면 좋겠는데.."라고 하셨지만 아들은

수시 다 떨어지고 정시로 대학에 겨우 합격했다.


아들의 명언한 줄: "엄마, 공부 1등은 혼자서만 잘하면 되는 거고

반장은 여러 사람이 뽑아줘야 되는 거니까 이게 더 어려운 거예요"


대학교 1학년 과대표가 되었다.

대학교 2학년 부장단에 입성 선거단을 조직하고 총학생회까지...


"엄마, 군대 꼭 가야 되는 거야? "가기 싫다고 울던 녀석이 400명 중 5명 조교에 당당하게 합격!!

28사단 무적 태풍 신병교육대대 빨간 모자 조교가 되었다. 난 둘째를 군대에 보내고 하노이로 오게 되었다.

수료식도 못 보고 첫 휴가와 마지막 전역일에 우리 가족은 한국에서 하나가 되었었다. 여러 번의 휴가는 형과 친구들과 보냈고 씩씩하고 당당하게 상남자가 되어 돌아왔다.


군대 전역 후, 학업을 더 이어갈 줄 알았지만... 아들은 베트남 하노이를 택했고 새로운 꿈을 꾸며

자신을 만들어 가고 있다. 공부보다 더 소중한 경험을 세상에서 배우겠다며 여전히 바뀌고 변하는

자신만의 꿈을 수정해가며 멋진 20대를 보내고 있다.


"네 꿈이 뭐니?"

KakaoTalk_20201211_173927327.jpg 작품명: 아들에게 엄마가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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