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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리스 h Apr 06. 2023

수국을 바라보며...

세월의 흐름


세월
        
물이 흐르는 동안
시간이 흐르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물이 흐르고

하늘엔 흰 구름
땅에는 꽃과 나무

날마다 새롭게
피었다 지는 동안
나도 날마다 새롭게
피었다 지네

모든 것 다 내어 주고도
마음 한켠이
얼마쯤은 늘 비어있는
쓸쓸한 사랑이여
사라지면서 차오르는
나의 시간이여

-이해인 수녀님-


어릴 적 할머니댁에는 연보랏빛 수국이 안뜰에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줄기하나에 꽃잎을 풍성하게 달고 자신도 버거울 정도로 큰 꽃송이를 뿜어냈다. 어릴 적 꽃잎을 따서 소꿉놀이를 할 만큼 수국을 흔하게 보고 자랐다. 


가끔 동생들과 숨바꼭질을 할 때도 수국 아래 몸을 웅크리면 내 키보다 크고 탐스러운 꽃망울들이 나를 잘 숨겨주었다. 백발의 할머니를 엄마는 무서워했고, 철 모르는 아이는 할머니댁에 자주 가서 꽃에 물을 주었다.


꽃처럼 피어나는 삶 


수국을 바라본다. 처음 꽃대를 올릴 때에는 꽃과 잎사귀의 색깔이 비슷하다. 잎사귀도, 꽃망울도 초록빛이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며 조끔씩 아주 조끔씩 색깔이 변한다. 하얗게 꽃을 피우는가 싶더니 다시 연분홍빛 꽃으로 변해가며 팡팡팡 꽃잎을 달고 피어나기 시작한다.


수국은 변덕쟁이
변심한 모습이 더 아름답다.


그 모습을 바라보니 나도 한때 수국처럼 팡팡팡 피어났던 적이 있었겠지... 토양에 따라 색이 다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하얀색, 연분홍, 보라색, 파란색, 각각 다른 색으로 변신하는  많은 소녀를 닮은 꽃 수국이다.


꽃말을 적어본다. 하얀 수국은 변덕 변심, 분홍색 수국은 처녀의 꿈, 보라색 수국은 진심이란다. 블루수국은 냉정 무정이라지만 아름다움을 차갑게 표현한 듯하다. 수국은 결혼식에도 많이 사용할 만큼 인기가 좋으며 물을 좋아하는 꽃으로 알려져 있다.(네이버 참고)


할머니는 이제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수국을 안뜰에 곱고 예쁘게 키우셨던 모습만 내 마음에 남겨두었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의 집에 가보니 담장이 높아졌고, 안뜰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대문과 지붕이 바뀐 채로 남의 집이 되어 있었다. 곱고 예뻤던 수국은 그 이후 볼 수 없었고, 결혼을 하고 힘겨웠던 서울살이는 수국을 잠시 잊을 만큼 분주하고 바쁘기만 했다.



현재, 베트남 하노이 나의 아파트 베란다에 수국이 살아서 숨을 쉬고 있으며, 매일매일 물을 먹고 자라는 중이다. 수국과 마주하다니... 꿈만 같다. 4월 5일은 나의 결혼기념일이다. 며칠 전 선물 받은 수국화분이 너무 예뻐서 밤이고, 낮이고 바라보며.... 세월의 흔적을 꺼내 보았다.

밤에 찍어본 수국 화분




코로나가 잠시 잠잠 해졌을 때  한국을 3년 만에 갔었다. 이사를 앞두고 할 일이 많았지만 여고 동창들의 번개팅에 나갔고, 아쉬움에 이사를 해놓고 친구들과 급 제주도 여행을 갔었다.


마노르블랑 수국카페다. 


30여 종의 수국을 마음껏 볼 수 있으며 사진 찍고 차 마시고 수국 속에서 신나게 친구들과의 찐한 추억을 함께 했었다. 수국이 지천이다. 우~~ 아 완전 황홀경에 빠질 만큼 예뻤다. 4월부터 8월까지 수국축제 기간이었고 우리는 5월에 갔었다.


수국수국해!

수군수군해!

수다수다해! 


왕수다를 떨며 하하하 호호호 웃던 친구들이 생각난다. 소녀였던 여고시절을 함께 보내고, 여전히 우정을 과시하며 지금도 잘 지내고 있는 친구들... 변심도, 변덕도 많았지만 우리는 그런 세월을 잘 버티어 냈고, 수국만큼이나 아름다운 우정을 쟁취했다.


수국의 계절이 돌아온다. 제주도를 한바탕 뒤 흔들고, 친구들과 마음속에 수국을 심어 두었다. 조만간 수국들이 제주도에 팡팡팡 피어날 것이다. 수국들에게 '올해도 파이팅! 힘내라! 꽃 팡팡팡 피워내라'라고 응원해 본다. 친구들에게도 수국을 생각하며 작은 행복을 송이송이 만들며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


한 떨기 꽃을 피워내는 일은 정원사의 몫이고, 바람과 공기와 햇빛은 공짜다. 흙과 물도 적절하게 채워져야 더 싱싱하고 예쁜 꽃을 오래도록 볼 수 있다. 내가 꽃이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고, 이제는 꽃을 기르고 가꾸는 정원사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공짜의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살지는 않았는지....


인생 속 나를 돌아본다. 한때는 아름다운 꿈을 꾸며 미래를 준비하느라 애썼고, 변심과 변덕을 부리며 고민했던 시절을 보냈으며 짝꿍을 만나 새로운 꽃이 피어나기를 바라며 살아왔다. 이만큼 살고 보니 모든 것이 다행이었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소소한 일상 속 작은 행복이 모아져 수국처럼 피어날 것이다. 너무 염려하고 걱정하지 말자.  난 지금 하노이 마담이 되어 수국을 바라본다. 소중한 기억을 마음속에 저장했다가 우울하고 힘든 날에 꺼내보며 새 힘을 얻는다. 오늘도...


작은 꽃망울이 모여 모여 탐스런 수국이 되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할머니의 유전자가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되니 지난날의 미움도, 무서움도, 원망도... 꽃잎이 떨어져 멀리멀리 사라지듯 마음속이 편안 해졌다. 변심과 변덕이 때로는 나를 성장시키고, 더 좋은 모습으로 바뀐다면 난 기꺼이 받아들이련다.


수국이 잠시 외출하고 돌아오니 풀이 죽어 있었다. 물을 듬뿍 주었더니 다시 고개를 들고 팡팡팡 피어났다.

수국처럼 그렇게 피어나는 삶이 되길... 바란다.

오늘아침 베란다 수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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