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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리스 h May 19. 2021

간장게장 먹은 후? 울었다.

금일봉은?

   내 고향 충청도에 가면 꼭 들리는 식당이 있다. 아버지, 엄마, 남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오붓하게 간장게장 집에 갔다. 080 전화로 인증을 한 후, 투명 유리판으로 거리두기를 하며 뜨문뜨문 손님을 받고 있었다. 항상 자리가 없거나, 기다리거나 예약을 해야 하지만 코로나 여파로 이곳도 손님이 줄어 자리가 비어 있었다.


아침 일찍, 서울에서 충청도로 남동생과 함께 출발했다. 작은 누나를 위해 특별히 월차까지 내고 나타난 남동생을 위해 편의점 초콜릿과 음료수, 홈런볼을 사들고 친정으로 내려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간장게장 그 집에 갔다.


베트남에서 사는 작은딸을 잘 기다려준 아버지, 엄마, 그리고 남동생에게 내가 한턱 쏘는 거였다. 집게발까지 쪽쪽 빨아먹고, 알이 꽉 찬 게딱지 속을 비우고, 두 손으로 잡고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는 간장게장 맛은 예술이다. 봉긋하게 올라온 계란찜에 보글보글 된장찌개와 물김치를 먹느라 나와 남동생에게는 마치 며칠 굶은 사자에게 내리는 포상 같은 한 끼였다.  


   타국살이는 언제나 먹고 싶은 한국의 음식들을 손꼽아 기다리게 하는 매력이 있다. 마법의 주문이 필요 없다. 맛있어져라! 가 아니고 그냥 맛있다. 음음.. 아무 말도 안 들린다. 무아지경으로 빠져든 나는 간장게장의 비릿함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츱츱츱... 쩝쩝쩝... 냠냠냠.


이렇게 맛난 간장게장이 그리웠다.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 입가심을 하고 친정 집에 도착했다.





   얼마만인가? 엄마와 아버지의 공간에 다시 오기까지...


오래되어 누렇게 발한 벽지를 산뜻하게 엄마가 좋아하는 연분홍 색으로, 소파 뒤 포인트 벽지를 돌무늬 벽지로, 전원주택 같은 느낌으로 반짝이 펄보라로 조명등 쪽을 강조한 인테리어 ㅎㅎ 따뜻하고 온화한 느낌으로

3년 전, 나는 32평 아파트 전체 도배비를 지불하고 도배를 해드렸다. 짐을 놓고 하는 도배라서 2배로 힘들었지만 마무리 후, 좋아하시는 두 분의 모습을 보며 잘했다는 생각을 했었다.


소파에서 뉴스를 보시다가 갑자기 아버지는 뭔가 생각났는지? 일어나 서재방으로 들어가셔서 흰 봉투와 편지를 들고 나오셨다. 티브이를 끄시고 소파 앞에 나를 세우더니 편지를 낭독하셨다.

'아뿔싸, 이거 뭐지? 감동이다. ㅠㅠ '


아버지의 편지글

동생들을 돌보며 어려운 삶을 살아온 큰 뜻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아버지다.

바람이 고요하면 파도도 없다. 인간은 환경이 가혹할수록 삶이 행복하다. 도전하며 사는 삶은 행복하다.

내일을 위해 글을 쓰는 작가로 당당하게 시련을 이기고 꿈을 이뤄가는 딸에게...

...........(중략)

아버지, 어머니께 손을 흔들며 정처 없이 먼 나그넷길을 가야 한다. 이것이 인생이거늘...


다섯 장쯤 되는 편지글을 읽으신 후, 두툼한 돈봉투를 건네주셨다. 오잉? 깜짝 놀라며 돈봉투를 밀었다.

 "아니에요, 이건... 편지만 받을 께요" 울컥! 내 마음과 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있다. 두 손으로 닦아내도 계속 흐른다. 손사래를 치며 극구 사양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편지와 돈봉투를 주고도 또다시 편지를 읽으셨다. 간장게장만큼이나 눈물은 짠맛이다.



 아버지는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붙이지 못한 편지와 돈을 넣어 챙겨두셨다며... 아버지의 사랑이 가득 담긴 금일봉과 편지 두 통을 이제야 전해준 것이다. 많이 약해진 나의 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눈물이 났다. 엄마도 옆에서 눈물을 훔치셨다. 아버지는 80세가 넘어가시며 귀가 잘 안 들려 보청기가 없으면 거의 못 들으신다. 보청기를 깜박 잊고 간장게장집에 오신 걸 모르고 나는 아버지가 내 말도 잘 못 알아듣는 건가? 걱정이 되었다. 엄마는 발목을 다친 이후 거동이 불편하시고 다리를 절뚝거리신다.맘이 ㅠㅠ




 

  그렇다!! 나의 빈자리를 남동생과 언니는 잘 지켜주고 있었으나 그래도 아버지 엄마에게는 둘째 딸의 빈자리가 많이도 그립고 휑~ 하셨나 보다. 게다가 코로나의 공격은 아버지, 엄마에게도 불안감을 갖게 한 듯했고 세월 앞에 고개 숙인 부모님을 보니 마음이 아려온다." 우리 딸, 언제 오는지? 알 수도 없고... 내가 또 언제 너에게 용돈을 줄 수 있을지.." 모르신다며 한줄한줄 나그네 같은 삶을 적어 놓으셨다. 마음이 울컥했고 눈물이 비처럼 주룩주룩 내렸다. 


카타르시스(그리스어로 정화를 의미하며 마음속에 쌓여있던 불안, 우울, 긴장 등의 응어리진 감정이 풀리고 마음이 정화되는 것으로 정서적으로 안정을 되찾는 일)다.


늘 강하고 카리스마 있던 호랑이 아버지는 간데없고 병들고 약해진 나의 아버지는 오만 원 지폐로 200만 원을 봉투에 넣어 주셨다.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애틋함이 전해져 눈물이 났다. 베트남살이가 쉽지는 않았지만 사업 초창기 자금을 해결하느라 맘고생한 것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좋아졌기에 아버지의 금일봉은 상상도 못 했다. 내 눈물은' 좀 더 일찍 와볼걸...'' 좀 더 베트남에서 나의 소식을 전해줄걸...' 바쁘다는 핑계 대며 전화도 짧게 하고 그저 인사치레 용돈을 보내는 것으로 효도를 대신했었다.  


내 마음속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린 듯 아버지, 엄마에게 죄송했다. 실컷 울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 해졌다. 아버지와 엄마에게 늘 씩씩하고 야무진 딸이 되려고 노력했다. 결혼 전, 결혼 후, 남동생들이 대학을 다니고, 군대를 가고, 다시 복학을 하고, 결혼을 할 때까지 난 두 아들과 남편 그리고 남동생 둘 즉, 5명의 남자와 함께 살았다. 남동생들이 남편을 따르고 아들들이 외삼촌을 좋아했지만 난 가끔 힘들었다. 나는 44, 55 사이즈에 작고 연약한 몸으로 5명의 남자들을 건사하며 살아냈다.




  지금은 각가정을 이룬 남동생들이지만 여전히 나는 대장부처럼 동생들의 짝나(작은누나)이고 우리 집 참견 대장이다. 그러나 5년 전 베트남으로 사업차 떠나면서 난 홀가분 해졌고 시댁도, 친정도 적당히 거리 두며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나의 빈자리가 모두에게 그리움이었고 사랑이었었나 보다.... 당분간만이라도 내 역할을 다시 해보려 한다. 난 늘 잡초처럼 시멘트를 뚫고 나왔고, 폭풍 번개 소나기에도 의연했으며 도움을 받기보다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살기 원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으로 삶을 평가하지만 난 보여주기 위한 삶보다 나만의 삶을 추구하는 편이다. 쓸데없는 똥고집을 피울 때도 있고, 나만의 방식에 태클을 걸면 쏘아붙이기도 하며 "당신이나 잘하세요~" 영화 속 대사를 읊어주고 싶다. 지금도 여전히 나의 방법대로 나의 능력만큼 살아내고 있다. 아버지와 엄마가 살아오신 것처럼 힘들다고 포기하지 않으며 열심히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인생 나그네의 삶이라고 하더이다. 아등바등 욕심부리고, 헐뜯고, 화내고, 상처 주고받아서

어쩌겠다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부질없이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며 살기에도 너무 아까운 시간들임을

떠나봐야 알려나?? 자신을 사랑하며 내면을 토닥여 주길 바란다. 누구의 탓도아니며 누구의 잘못도 없다. 그저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터인데...

 

엄마랑 오랜만에 따뜻한 잠자리를 보내고 서울로 돌아왔더니 급 피곤함이 밀려오지만 난 글을 쓰고 있다. 그저 지금의 나를 기록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엄마, 존경하는 아버지!! 살아 있음에 효를 할 수 있도록 기회 주심을 감사합니다. 지난날에 아쉬움은 바람에 실려 보냈으니 편안하게 딸의 삶을 응원해 주시길...


'하숙생' 아버지의 노래이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아버지 어머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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