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빵 굽는 냄새가 골목 안에 진동한다. 빼꼼하게 열어놓은 대문 사이로 목을 쭈욱 빼고 몰래 들여다본다. 뜰앞 마루에 빵이 그득하게 쌓여 있다. 배고픈 시절 빵 굽는 냄새만으로도 행복했던 기억을 소환해 보려 한다. 내 고향은 충청도이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유난히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있었다.
빵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둔 J이다. 학교에 가려면 그 집 앞을 지나가야만 한다. 골목길 안쪽에 그 친구의 집이 있었다. 늘 조용하고 착했던 친구는 방과 후 놀지도 않고 곧장 집으로 가기에 말을 걸어볼 틈 조차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왔다. 우산이 없어 처마 밑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그 친구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랑 우산 같이 쓰고 갈래?"어색함은 잠시~ 나는 멈칫거릴 새도 없이 우산 속으로 쏙 들어가 팔짱을 끼고 몸을 밀착시켰다. 우정이란? 함께 우산 쓰는 거?
얼마나 다행인지.. 비를 맞지 않아서 좋았고 사귀고 싶은 친구여서 더 좋았다. 수다를 떨고 있는 나에게 친구는 말했다. "우리 집에 갈래?" 내가 원했던 일이다. "그래 가자!" 신이 났다. 나는 빵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새 친구네 집 빵공장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맛난 빵들을 만들고 식히고 포장하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00이에요" 인사를 했지만 듣는 둥 마는 둥 얼굴에 땀범벅이 되신 친구의 엄마는 연신 빵 포장을 하시느라 바빴다. 친구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일손을 거들었고 난 친구 옆에서 판매가 어렵거나 모양이 흐트러진 빵들을 모아놓은 박스 속 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는 나에게 한 개를 건네주며 "먹어볼래? 괜찮아 이건 팔 수도 없는 것이라 마음껏 먹어도 되는 거야"허름한 부스러기 빵은 나의 허기진 배를 채웠고 너무나 맛이 있었다. 그때 그 맛을 기억해 내려 애쓰지만 나의 혀는 그 빵을 기억할 수없을 만큼 둔해져 있다.
그날 이후 오랫동안 난 그 친구의 집에 자주 갔다. 보물창고 같은 박스 속 빵을 먹기도 했고 가끔은 일손을 돕고 종이봉투 가득 빵을 얻어 오기도 했다. 한 동안 나와 친구는 학교를 마치면 친구네 집으로 가는 게 일상이 되었고 함께 공부도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그 친구는 빵공장의 허드렛일을 피하고 싶었는지?... 가정불화로 엄마 아빠 사이가 좋지 않아 그 모습을 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방과 후, 청소가 없는 날이나 학교를 마치면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눈치 없는 나는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중학교에 가면서 우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나는 이사를 하여 그 동네를 떠나게 되었고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그 친구와 나는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단팥빵의 추억은 그렇게 아쉽고도 빠르게 잊혀져 갔다. 가끔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받쳐준 그 친구가 생각나서 살던 동네 골목 안 친구네 빵공장을 기웃거렸지만 그 친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춘기 소녀들의 우정은 우산 속에서 단팥빵처럼 끈끈했고 오랫동안 기억의 저장고에서 먼지 떨고 나니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단팥빵을 먹을 때마다 난 지금도 그 친구를 떠올린다. 삶의 순간순간들을 살아내느라 힘 겨울 때에도 달달한 단팥빵 한 개로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선물해준 그 친구를 만나고 싶었다.
베트남을 오기 5년 전 수소문해서 친구를 찾아 한번 만났다. 30년 만이다. 10대의 소녀에서 아줌마가 되어버린 긴 세월이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두 손을 마주 잡고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를 무작정 끌어안았다. 토닥토닥 서로의 등을 두드려주고는 짧은 만남을 가졌다.
우리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타임머쉰을 타고 다시 10대 소녀로 돌아간 듯 반가웠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긴 침묵의 시간을 깨고 "너는 어찌 살았어? " 긴말이 필요 없었고 그저 맞잡은 손을 비벼주며 삶의 묵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다. 그렇게 한동안 세상이 멈춰 있는 듯했다.
" 친구야~우리 앞으로 자주 연락하고 만나자"약속을 했지만 삶은 우리에게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짧은 만남 긴 이별의 시간을 또 갖게 되었다. 난 남편을 따라 베트남 하노이에 오게 되었고 친구도 바쁜 일상을 살아내느라... 또다시 긴 이별의 시간을 갖게 되었고 각자 다른 곳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답하는 우리가 되었다.
흐른 시간만큼이나 우리는 서로에게 애틋함은 적었다. 풋풋한 소녀시대를 떠올리면 그 친구가 보인다. 아마도 내 기억의 창고 속 어딘가에 고이고이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든 빵과 팥의 만남처럼 맛있고 행복하게 살아주길 바란다.친구의 모습이 가물가물하다.
오늘도 빵 굽는 냄새와 단팥빵의 달콤한 추억 속으로 풍덩~빠져본다. 그때부터인가? 나는 단팥의 매력에서 지금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팥쥐 엄마(팥을 좋아해서)로 살고 있다.
팥앙금이 듬뿍 들어간 단팥빵, 오랜 전통의 맛 연양갱, 새알심이 들어간 동지 팥죽 또는 단팥죽, 살얼음 위에 고이 올린 팥 듬뿍 팥빙수, 팥으로 만든 아이스 비비빅과 붕어싸만코, 팥소 들어간 호빵과 찐빵, 통팥이 들어간 붕어빵, 뜨끈뜨끈 팥 칼국수, 입시철에 먹었던 찹쌀떡(모찌), 팥고물 올린 찰 시루떡, 팥앙금 절편, 팥밥까지...
빵빵빵!!! 팥 팥 팥!!! 내 옆구리살은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