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편지
뾰족한 돌섬을 지나 우유 빛 안갯속으로 온몸을 젖히며 나아간다. 꼬박 하루를 새어 나아가다 보면, 마침내 그곳에 도착하게 된다. 우리들의 섬. 지금은 버려진 섬이지만, 나는 아직도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에서 끊임없이 노래하던 그날의 작은 소녀를 떠올리곤 한다.
"나는 형을 본적 있어."
고개를 젖히며 우쭐한 표정으로 말하던 소년이 자랑스럽게 내보인 건 한 통의 편지였다. 나는 소년의 그 거만한 얼굴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는지라 또래 남자아이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재빠르게 낚아챈 뒤, 개나리가 활짝 핀 오솔길을 냅다 뛰었다. 야 이 계집년아! 봄바람을 타고 소년들의 아우성이 둥둥 떠다녔다. 바보처럼 잘라버린 바가지 머리가 휘날리며 발그레한 볼을 스치자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오목조목하게 어울려져있는 글 무리의 끝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정갈하고 올곧게 뻗친 글씨의 무리들은 숨 가쁘게 뛰던 나의 가슴 위로 둥글면서도 쭉, 막힘없이 쓰여 있었다. 석 자의 사이사이에선, 언제가 언니가 집 앞 터에 심었던 빨갛게 익은 칠 월의 장미의 향이 났다.
금색으로 쓰인 남자의 이름이 섬 여기저기서 나부낀 그날, 유난히 섬으로 내려오는 햇 빛의 영광이 강하던 그날, 언덕 위 나의 유년과 함께 버티어온 한 그루의 벚꽃 나무가 흔들리며 섬을 뒤덮어 버린 그날, 나는 처음 그를 볼 수가 있었다.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보리싹 마냥 허둥 되던 마을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나타난 그는 귓등에 태양을 언 고 잔잔한 바다와 같이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래의 코흘리개들이 소리를 치며 그에게 달려가 안기었다. 나는 언니의 노란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꼬옥 부여잡고 부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언니가 나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괜찮아하고 위로했다. 그의 고개가 꺾이며 내 쪽을 향했을 때, 깜짝 놀란 것은 그의 시선도 아니었고 돌에 부딪히며 하얀 거품을 우리에게 뽐내던 파도의 장난도 아니었다. 언니의 손이 감출 수없는 감정을 내 비치며 나의 어깨를 짓 눌렀다. 언니는 말없이 돌아섰다. 그런 언니의 손을 잡고 나보다 한 뼘이나 높이 자라있는 언니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무너져 있었고, 그 의미를 깨닫기에는 나는 너무 어렸다.
언니에게는 약혼자가 있었다. 마을의 몇 안되는 젊은 남자들 중 하나였고, 하릴없이 우리 집에 연신 드나들던 코흘리개들의 형이었다. 언니는 그를 항상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나도 그가 싫었다. 그가 나타나면 언니를 주방에 숨긴 채, 허리 춤에 두 손을 올리고 백 소리를 치며 그를 매몰차게 쫓아 내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몇 해가 지나고 언니의 나이가 점점 차오르자 어른들이 발 벗고 나서 그들을 이어주기 시작했다. 언니는 받아들였다. 나는 그가 더욱 싫어졌다.
"주옥아. 뭐 가지고 싶은 건 없노?. 이 담에 도시로 나가면은 하나 사다 줄라니까."
"됐어야. 그딴 거 필요 없응께, 언니야 앞에 알랑거리지나 말으야!"
그러면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햇빛에 검엏게 탄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나가 네 언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곧 섬도 떠날 수 있어야. 너도 데려 갈라니까. 오순도순 살면 얼메나 좋겠냐. 주옥아"
"무슨 소리 당가. 우리가 왜 섬을 떠난 데야. 그럴 일 없으야!"
나는 다음에 오는 그의 말을 듣고 끅끅거리는 울음을 참으며 돌담으로 이어진 마을의 고갯길을 따라 집으로 달려갔다. 개들이 내 뒤를 쫓으며 멍멍거렸다. 저리 가라니까! 저리 가! 개들은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며 더욱 뛰어다녔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마을이 떠나가라 울어 젖혔다. 그러면 고갯길 끝에서 언니가 놀라 뛰쳐나와 나를 안고 달래었다.
"내 귀여운 동생. 누가 울렸다니. 주옥아. 울지 마. 응?"
"언니야. 언니야. 섬을 떠나다니 아니 지라?"
언니는 마을이 떠나라 울어되는 나를 껴안고는 연신 아니라고, 떠나지 않는다고, 너를 두고 어딜 가냐고 말하며 나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리곤 언제나 그런 일이 있는 밤이면 등 뒤돌아 남몰래 흐느끼던 언니의 모습이 어린 나의 두 눈에 상처로 남아 흘러내렸다.
어는 날보다 자욱한 안개가 섬을 둘러쌓던 그날의 오후. 섬의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만개한 벚꽃 나무에 올라타 섬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느닷없이 그가 나에게 나타났다.
"네가 주옥이니?"
나는 나무의 그늘에 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런 나를 향해 빙그레 웃고는 한동안 말없이 회색 돌들 사이에 자라난 벚꽃나무를 바라보았다.
"부탁이 있어. 이 편지를 언니에게 전해 주지 않을래?"
그가 내민 편지는 코흘리개 소년들이 가진 편지보다 좋아 보였다. 나는 나무에서 뛰어내려 그가 내민 것을 받아들였다. 노오란 봉투에선 저번에 맡은 것과 같은 장미향이 강하게 풍겨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향해 활짝 웃었다.
태양이 바다 너머로 가라앉자 안개가 더욱 짙어져 얼핏 보면 우유가 허공에서 흩뿌려져 마을을 떠다니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한 어구의 공터에서 나는 그의 편지를 쥔 손을 들어 보이며 나를 빙 둘러싼 소년들에게 자랑했다. 소년들은 그런 나를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특히, 그의 오래된 편지로 나에게 자랑하던 그 소년의 눈앞에서 노오란 편지를 힘차게 흔들어 보였다. 장미꽃 향이 나풀 되며 녀석의 코를 간지럽히는지, 소년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수그렸다. 장미의 향에 취해서 였을까. 나와 코흘리개 소년들은 어른들이 소리치며 우리를 찾을 때까지 안개를 헤치며 섬 구석구석을 뛰어다녔다.
언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엄마 아빠의 잔소리와 회초리에 겁을 잔뜩 먹었지만 예전보다는 참을만하였다. 오히려 잠든 언니의 얼굴이 더욱 슬퍼 보였지만 나는 이불을 얼굴까지 덮고 편지를 가슴팍에 꼭 껴 안은 채, 행복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그가 떠났다는 소식을 밥을 먹으며 전해 들었다. 아빠는 그가 이른 새벽, 동이 트자마자 배를 타고 떠났다고 하였다. 그가 떠나는 것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언니는 조용히 밥숟가락을 내려놓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엄마 아빠는 그런 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노기 띤 아빠의 얼굴에 나는 괜스레 겁을 집어먹고는 끅 끅 거렸다. 그렇게 시작된 딸꾹질은 오후 즈음에 정착하는 섬 어구의 배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멈추어 있었다. 언니와 나는 마을 사람들을 탄식 어린 비명을 들으며 사색이 된 얼굴로 어구에 다가갔다. 정착한 배에선 코흘리개 오빠와 몇 명의 어른들이 온몸이 젖어 축 처져 있는 사람을 들고는 사람들을 헤치며 어구로 힘겹게 나오고 있었다.
"비키라니까. 아 뭣들 하는가! 구경났소. 도울 거 아니면 다들 물러나소들!"
언니가 비명을 지른 건 그때였다. 나는 너무 놀라 자리에 주저앉았다. 언니는 나의 손을 뿌리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른들이 그런 언니를 붙붙잡으며 말렸다.
"이것아. 봐서 어쩌자는 겨."
"놔요. 이거 놔랑께요!. 아니여요. 아닐 거예요."
어른들이 언니를 붙잡고 있던 그 순간, 나는 사람들 틈 사이로 온몸이 푸르게 변해, 복어처럼 부풀어 올라 누어있는 그를 볼 수가 있었다. 생명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돌과 같이 회색으로 꺼진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편지는 어디에 있니. 왜 전해 주지 않았어? 그렇게 부탁했는데.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나는 두 귀를 막고 벌벌 떨며 소리쳤다. 애는 또 왜 이러는 거야. 마을 어른들이 발버둥 치며 소리치는 나를 부여잡고 진정시키려 노력했지만, 나는 얼마 안 가 짧은 비명과 함께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큰일 날 뻔 했다니껭. 주옥이 아가 아니었으면 다 뒤졌부렸을꺼여."
"쯧쯧쯧. 이 무슨 희귀한 일이당가. 하늘이 도왔지에. 김씨네는 불쌍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제."
"눈을 떴을 때는 엄마 품에 안겨있었다. 머리를 쓰담으며 눈을 뜨는 나를 보며 엄마는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며 말했다.
"주옥아. 참말로 잘했다. 우리 주옥이가 언니를 살렸구먼 . 참말로 잘혔어."
엄마의 뜨거운 눈물이 나의 볼에 떨어지며 입속으로 들어왔다. 바닷물처럼 짠맛이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나는 또다시 잠기어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은은하게 풍겨오는 장미꽃의 향을 맡으며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