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은행 열매가 남긴 것
'만끽': 욕망을 마음껏 충족함
'만끽하다'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본다. 고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니다. 명사 ‘만끽’은 한자로 滿喫, '찰 만'과 '먹고 마실 끽'이다. 따라서 ‘만끽’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가득차게 먹고 마심’이라는 뜻이 된다. 이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만끽’의 첫 번째 의미인 ‘마음껏 먹고 마심’과 통한다.
단어의 의미장은 시간이 지나며 확장되기도 한다. 따라서 ‘만끽’은 ‘욕망을 마음껏 충족함’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인 ‘먹고 마시고자 하는 욕망’에서 욕망 전반으로 그 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만끽’의 용례를 보면, ‘만끽’은 확장된 의미로 더욱 많이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만끽’의 두 번째 의미이다. 이제 두 번째 의미에 집중하여 생각해본다.
가을을 만끽하려면, 은행 냄새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휴가 도중 전역 이후의 출국을 위해 여권을 발급받으러 구청에 갈 일이 생겼다. 내가 살고 있는 일산서구의 구청에서는 여권 업무를 보지 않는다고 하여 일산동구청으로 가야했다. 동구청까지 자동차를 타고 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엄마가 '가을을 만끽'하자며, 갈 때는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산책하며 걷자고 하셨다. 가을 날씨가 화창해서 나도 마침 산책을 하고 싶었던 터라 그렇게 하기로 했다.
여권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만 보 정도 되는 거리를 산책했다. 쌀쌀하지만 맑은 가을 날씨에 기분이 좋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나는 '가을을 만끽하자'라는 말을 반복했다. 장난스럽게 팔도 넓게 벌려보고, 숨도 크게 들이쉬면서 가을을 만끽해보았다. 그렇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던 그 때, 한 순간 은행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개를 숙여 거리를 바라보니 은행 열매들이 지뢰처럼 길에 떨어져있었고 매해 찾아오는 익숙한 고약함이 우리의 '만끽'을 방해했다. 가을의 계절감을 마음껏 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다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가을을 만끽하려면, 은행 냄새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은행 냄새까지 만끽했을 때 가을에 대한 욕망을 '마음껏 충족'했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은행 냄새 역시도 가을의 일부분인데, 가을을 몽땅 즐기는 상태가 가을을 ‘만끽하는’ 것이라면, 은행의 묘한 악취까지도 수용해야 비로소 가을을 만끽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마음껏 즐기려고 했을 때, 그것이 완전히 내 마음에 들 수 있을까?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거슬리는 구석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구석까지도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만끽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의 은행 냄새 같은 사건들이 인생에도 존재한다.
휴가 도중에 나와 비슷한 시기 입대한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는 나와 비슷한 시기 입대한 또 다른 친구와 통화를 했다. 전역을 4-5개월 남긴 우리 셋은 공통적으로 우울을 말했다. 흘러가버린 시간에 대한 억울함, 아쉬움을 말했다. 남은 시간이 아직도 하염없게 느껴질 때의 아득함, 그리고 사회에 내던져진 후 마주해야 할 새로움을 대하는 두려움과 어색함.
가을의 은행 냄새 같은 사건들이 인생에도 존재한다. 개중에는 군대와 같이 나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한 개인으로서의 무력감, 허무함이 느껴지는 일들도 있다. 특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 가장 큰 절망감을 느낀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건 내 인생 속 은행 냄새들도 몽땅 사랑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내 인생을 이해해보는거다. 그렇게 내 인생을 만끽해보는거다. 나는 내 인생을 사랑하는만큼, 내 인생 속 고난들도 사랑해보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