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백: 가닿지 못하는 말의 애석함

김여명의 '방백'을 들으며

by SOO
연극에서, 등장인물이 말을 하지만 무대 위의 다른 인물에게는 들리지 않고 관객만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는 대사

연극에서 등장인물의 대사를 처리하는 방식 가운데 ‘방백’의 형식이 있다. 방백은 한자로 傍白, 곁 방과 아뢸 백이다. 즉, 의미 그대로라면 인물의 곁에서 발화되는 대사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실제 ‘방백’의 의미에는 한 가지 조건이 더 추가된다. 방백은 무대 위의 다른 인물, 즉 대사하는 인물의 곁에 있는 인물에게는 들리지 않는다고 약속된 대사이어야 한다. 따라서 방백은 ‘연극에서, 등장인물이 말을 하지만 무대 위의 다른 인물에게는 들리지 않고 관객만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는 대사’로 정의된다.


대표적으로 셰익스피어의 극 중 ‘맥베스’, 소포클레스의 극 중 ‘안티고네’가 방백을 통해 자신의 속마음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맥베스는 왕위에 대한 자신의 야망을, 안티고네는 자신의 도덕적 신념과 가족에 대한 충성을 방백을 통해 드러낸다. 방백은 주변 인물들이 모르는 사실을 관객만 알게된다는 점에서,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줄거리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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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방백이 전달하는 내용보다는, 방백이라는 대사 형식 자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최근에 들은 노래 중 ‘방백’(김여명)의 노랫말이 떠오른다.



이젠 나의 노래 속에도

넌 등장할 일이 없겠지만

내 낡은 스프링 노트에 네 글씨마저

내가 어쩌지는 못할 거야

그대여 할 말이 있어도

내가 대신 묻지 않아줄게요

오 우리 젊은 사랑 슬퍼라

아름다웠기에

김여명, ‘방백’ 중에서


거리와 가능성이 모순을 품고 멀어지는 순간이 '방백'이라는 단어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이다.


이별의 심정을 ‘그대’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담담히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방백’이라는 노래의 제목은 이 발화가 상대방에게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방백은 곁에 있는 이에게 영원히 가닿을 수 없는 말이다. 가닿을 수 없는 말이 존재 자체로 담아내는 애석함이 있다. 이 노래가 담담하지만 끝없이 슬픈 이유다. 상대방은 ‘곁에 있’지만 ‘들을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거리와 가능성이 모순을 품고 멀어지는 순간이 ‘방백’이라는 단어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근원적으로 고독하다.

인생 자체가 거대한 방백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곁에 있는 타자들은 곁에 있을 뿐이다. ‘곁’이라는 말은 가까움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거리가 있음을 전제로 한다. 가까울 수 있지만 그 뿐인 것이다. 자신이 아니라 타자인 순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고, 말해도 온전히 타자의 마음에 닿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발화하고자 하는 노력이 결국은 방백이었음을 깨닫고 나면 존재가 근원적으로 고독하다는 점이 피부로 느껴진다. 하지만 근원적인 고독이 꼭 비관으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불가피한 고독을 인정하고나면, 관계맺음에 느긋해질 수 있다. 자신의 독백에 더 귀 기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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