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빅은 그리 좋은 남자가 아니었다.
시리즈 초반의 빅은 자기의 영역을 절대 내어주지 않는 남자였고, 캐리에게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한 그 어떤 확답도 주지 않더니, 결국 다른 여자와 홀랑 결혼해 버리는 사람이었다. 영화에서는 무섭고 겁이 난다며 결혼식 장 입구까지 와 놓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버리는 비겁하고 치사한 사람이었다.
캐리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빅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그야말로 염병 천병을 떨었는데,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답답하기도 했다. 왜 에이든이 아니라 꼭 빅이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나 캐리가 포스트잇에 이별을 말하는 찌질이나, 자기밖에 모르는 러시아 예술가를 만날 때는 그래도 빅이 좀 그립기는 했다. 빅이 최고라는 게 아니라, 그나마 낫다는 거지.
빅이 죽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빅, 그러니까 존 제임스 프레스턴 역을 맡은 배우 크리스 노스가 성폭행 의혹에 휩싸이면서 사라 제시카 파커를 비롯한 여배우들이 그를 손절했기 때문이었다. 여성들의 주체적인 성생활을 그려내는 작품에서 성폭행을 폭로당한 남자를 출연시키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그래, 그것까지는 이해한다.
배우에게 문제가 생겨 드라마 자체를 망치는 경우를 많이 봐 왔고, 갑자기 실내 바이크 운동기구를 타다가 죽은 게 어이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캐리가 빅을 쉽게 잊지 못하는 모습을 그려내려고 노력을 하기는 한 것 같아서 이해한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섹스앤더시티> 팬들의 탄식을 불러일으킨 건 사만다에 대한 부분이었다.
물론 이것도 드라마 내용 외적인 문제였다.
4명이 주인공인 이 시리즈에서 사만다 존스 역을 맡았던 킴 캐트럴이 나머지 세 명의 배우와 사이가 틀어지면서, 그러니까 이상하게 왕따 아닌 왕따를 당하면서, 가장 인기가 많은 캐릭터였음에도 리부트에는 함께하지 못했다. 드라마가 영화로 만들어질 때부터 잡음이 있었지만, 킴 캐트럴이 양보해서 두 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었다.
그래, 이것도 이해한다.
진짜 사라 제시카 파커가 킴 캐트럴을 질투해서 따돌렸든, 킴이 세 명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든, 모든 게 사람이 하는 일이니 어떻게 다 마음이 맞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사만다가 고작 홍보 일을 안 맡겨줬다고 캐리를 떠나버린 설정은,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다.
제작진은 사만다가 누군지 모르는 걸까?
분명히 사만다가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좋게 풀어낼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 따위 이유로 절교하기엔 그동안 <섹스앤더시티>에서 네 명의 주인공이 서로를 등져버릴 수 있는 막장 에피소드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럼에도 함께였던 그녀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사만다는 쿨함의 대명사였고, 탁월한 추진력으로 친구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데 큰 도움을 줬던 인물이다. 그녀의 부재를 이런 식으로 처리해버린 건 팬들에게 아쉬움을 넘어선 분노를 선물했다.
...얘기하다 보니까 진짜 열받네.
미란다가 체와 사랑에 빠지는 건 말하고 싶지도 않다. 미란다와 스티브가 어떤 커플이었던가. 수많은 역경을 거치고 결국 서로를 선택한 커플이 아니었던가. 심지어 영화에서는 미란다가 자꾸 섹스를 거부해 스티브가 바람을 피우고 그것을 용서하는 에피소드까지 나왔는데, 그런 미란다가 갑자기 삶이 권태롭다며 여자와 섹스를 하다니. 미치지나 않고서야.
원래 미국은 이성애자였던 사람이 나이 오십이 넘어서 양성애자가 되기도 하나요? 내가 꽉 막힌 거예요? 예?
물론 <AND JUST LIKE THAT: SEX AND THE CITY>의 시즌2가 나오면 나는 또 습관처럼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사랑하던 것에 실망했다고 해서 단칼에 돌아서버릴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내용과는 별개로, 나는 여전히 캐리 브래드쇼를 보는 게 좋았고, 이상하게 그녀를 보고 있으면 한창 재밌게 이 시리즈를 보던 20대 초반의 내가 된 것 같아서 좋았다. 이미 캐리와 내가 너무 늙어버렸다고 해도.
<섹스앤더시티>처럼, 꽤 많이 변해버렸지만 아직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픈 것들이 있다.
내가 처음 농구를 보기 시작했을 때 신인이었던 선수들이 이제는 하나둘씩 은퇴를 하고 있다는 것, 부르면 언제든 나오던 친구들이 이제는 각자의 가정과 직장에 헌신하느라 얼굴 보기도 힘들어진다는 것, 임대 현수막이 붙으면서 사라져 가는 내 학창 시절 맛집 같은 것들.
나의 소녀시절은 진짜로 끝나간다는 걸 실감할 때마다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두려웠다. 모두가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맞게 살아가는데, 나만 어느 한 시점에 멈춰있다는 생각은 나만 하는 걱정이 아니길.
내가 드라마를 좋아하는 건 볼 때마다 그 작품이 나왔던 그때에 멈춰 있을 수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나는, <커피프린스 1호점>의 2007년을 너무도 사랑했고, <찬란한 유산>의 2009년을 그리워하며,
<로맨스가 필요해 2012>에 미쳐 있었던 2012년도로 돌아가면 조금 더 열심히 살아볼 거라는 의미 없는 다짐을 하곤 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변화가 다 마음이 아프다고 말할 수도 없다. 변화가 있어야 성장하고, 성장해야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모양이다. 정신 차리자, 이 각박한 세상에서...
사랑하는 것들이 변하는 동안 나는 또 사랑하는 새로운 것들을 찾아내고, 변해가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인생은 언제나 연습, 또 연습, 경험, 또 경험이니까.
영원할 수 없는 것들을 잘 떠나보내주는 방법이라도 누가 좀 알려주면 좋으련만.
사진 출처
인스타그램 @justlikethatma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