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의 차이는 크다. 2학년과 1학년의 차이는 더 크다. 고작 한 살 차이가 그렇게 크겠냐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렇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던 아이들이 3학년이 되자마자 삶에 찌든 아우라를 내비치는 것이 신기하다. 아이들은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 걸까?
쟤는 왜 저렇게 떠들고 왔다 갔다 하는 거야,라는 의문이 들어 슬쩍 공부하고 있는 책을 보면 거의 100%의 확률로 1학년인 경우가 많다. 아직 중학생 티를 완전히 벗지 못하고 공공예절에 대한 중요성을 완전히 습득하지 못한 어린아이들이다. 이 나이 때 아이들이 또 웃긴 게, 혼자 왔을 때는 아주 조용하지만 친구와 같이 오면 가정교육이라는 걸 받아 본 적도 없다는 듯이 날뛰곤 한다. 또래 집단의 영향이 이리도 대단하다니, 어이가 없어서 같은 아이가 맞는지 몇 번씩 확인하다 보면, 이 나라에 미래가 있기는 한 건지 의문스럽기도 했다.
최근 드라마에서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들이 묘사되고 있다. 학벌에 미친 사회의 모습은 말할 것도 없고, 촉법소년의 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사회적 문제까지 드라마에서 끊임없이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드라마에서는 10대 청소년들을 꽤 아름답게 묘사했다.
옥림이를 처음 만난 건 2003년이었다. 내 또래 아이들의 첫 청소년 드라마인 <반올림>의 주인공이었던 그녀의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 아직도 기억난다. 그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내용들이 아주 귀여웠다. 친구들 간의 시기와 질투라든지, 좋아하는 선배와의 학교 로맨스라든지 하는 내용들이었다.
99년부터 드라마 학교 시리즈가 시작되었다지만, <학교 4>가 끝나고 <학교 2013>이 시작되기까지 10년의 시간이 있었기에, 결국 나에게는 <학교 2013>이 첫 학교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작품은 배우 이종석과 김우빈의 시작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종석 배우는 이 작품 직후에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드라마로, 김우빈 배우는 <상속자들>이라는 드라마로 그 해에 가장 주목받는 스타가 되었다. ...멋있어요. 꼭 제2의 정우성, 이정재가 되어보세요. 내가 많이 바라고 있으니까.
멋진 두 배우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이 은혜로운 드라마에서도 소위 말하는 일진이 나오고,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가 나온다. 이때까지만 해도 문제아들은 예전부터 그려져 왔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불퉁한 눈빛을 하고, 욕을 하며, 삐딱한 태도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집안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은 아이들. 사실은 속에 따뜻함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지만, 가르쳐줄 부모가 없고, 생활환경이 넉넉하지 않아 마음의 여유가 없는 모습들. 알고 보면 불쌍한 아이들.
그러니까, 예전에는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은 소위 말하는 '흙수저'들이었다.
하지만 10년 뒤의 문제아들은 '금수저'다.
표면적으로 이들은 문제아가 아니다. 공부를 잘하고 부모가 돈을 잘 번다. 선생님에게는 깍듯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이보다 더 바람직해 보일 수가 없다.
일탈의 정도도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친구를 괴롭히는 건 기본이고, 거기에 더해 아주 깊은 범죄의 세계로 들어간다. 드라마는 언제나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바뀌어가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드라마에도 나타나고 있는 걸까.
공개되자마자 엄청난 화제를 불러 모은 드라마 <더 글로리>는 바뀐 문제아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Netflix/극본 김은숙 연출 안길호/송혜교, 임지연, 이도현 등 주연)
물론 이 드라마에서 학교 폭력이 일어나는 시점은 아주 옛날이지만, 소위 말하는 '신분' 차이에 따른 문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낀다.
"난 이래도 아무 일이 없고, 넌 그래도 아무 일이 없으니까."
도대체 왜 나를 괴롭히냐는 어린 동은(정지소 분)의 말에 어린 연진(신예은 분)의 대답이다. 이 아이는 알고 있다. 고데기로 다른 사람의 몸을 지지는 것이 나쁜 일이라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다. 다만, 부모님의 재력이 자신의 힘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쁜 짓을 해도 자신의 인생에 아무 문제가 안 생기는 걸 악랄하게 이용한다.
동은(송혜교 분)의 과외 제자도 마찬가지다. 동은을 진짜 선생님, 아니 선생님까지는 아니더라도 같은 인격체로만 생각을 했어도 절대 하지 못했을 말들을 서슴없이 한다. 그럴 때 흘러나왔던 동은의 내레이션이 인상적이었다.
'네 덕분이야, 연진아. 이런 순간에 놀랍지도 않은 거. 대체 니들은 날 어떻게 알아보는 걸까.'
아이들은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기가 막히게 알아보는 눈이 생겼다. 모두가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재력에 따라 계급이 나누어진다는 걸 요즘 아이들은 일찍 깨달아버렸다.
드라마 <약한 영웅>의 나쁜 놈도 전형적으로 있는 집 아이들이다.
(Wavve/극본 유수민 연출 유수민/박지훈, 최현욱, 홍경, 이연 주연)
영빈(김수겸 분)은 집이 잘 사는 건 물론이고 공부도 잘하니 선생님들도 이 아이의 편일 수밖에 없다. 이 아이 역시나 자신이 다른 친구를 괴롭혀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고, 다른 아이들이 자신에게 꼼짝하지 못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가 나타난다. 연시은(박지훈 분)이다.
시은은 약한 영웅이다. 체구가 작고 힘이 없다. 하지만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의 영웅이다. 똑똑하고 강단이 있으며 근성도 있다. 이 아이는 상위 계급에 있는 아이들에게 절대로 그냥 당하지는 않는다. 어떻게든 그들의 마수에서 벗어나고 자신보다 더 약한 친구에게 힘이 되어 준다. 영빈은 그런 시은을 꺾기 위해 무려 펜타닐 패치를 사용한다. 청소년들의 마약, 10대들이 많이 사용해 문제가 되고 있다는 바로 그것. 이건 드라마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청소년들의 일탈을 넘어선 약물 문제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고, 이걸 드라마로 옮겨 놓은 것뿐이다. 이런 걸 보면 개나 소나 핀다는 전자담배는 이제 귀여운 수준이다. 아이들은, 도대체 정말로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그동안 어떤 작품이라고 말할 것도 없이 거의 모든 작품에서 돈이 많은 사람이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는 모습을 많이 봐왔다. 그 연령대는 점점 낮아지고 결국 학교까지 그 지긋지긋한 계급 사회의 폐단이 번진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선, 아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웅이 필요한 게 아닐까. 약하고 강하고의 문제를 떠나서 어떤 식으로든 아이들에게는 인생의 구원자가 필요하다. 그게 시은과 같은 진짜 영웅일 수도 있고,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는 아이돌 가수일 수도 있고, 50%의 확률로 돈을 딸 수도, 잃을 수도 있는 모바일 도박일 수도 있는 문제이다.
주말 아침 일찍 공부를 하러 와서 <재벌집 막내아들>만 2시간째 보고 있는 한 아이를 보자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드라마가 아니라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었다면, 옛날 사람(a.k.a 꼰대라떼)으로써 더없이 흐뭇했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주말을 편안하게 드라마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 일일까 생각했다. 먹고살기 힘든 시대에 청소년들은 그저 청소년답게 뛰어다니기만 했으면 좋겠다. 원래 아이들은 뭣도 모르게 깔깔 거리는 게 매력이 아니던가.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고 했는데, 아이들에게는 그런 영웅이 필요하지 않은, 평화로운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그냥 게임 이야기나 하고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며, 남는 시간에나 공부하는 척하는, 약한 영웅조차 필요 없는, 그런 해맑음으로 살 수 있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