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연예인과 농구밖에 몰랐던 그때의 나였지만, 그래도 도서관에서 책을 몇 권 빌려 읽었던 적이 있었다.(장하다, 그때의 나). 솔직히 말하면, 주로 영화 기본 이론이나 시나리오 용어들에 대해 알 수 있는 책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속에서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소설 제목이 바로 시드니 셀던의 <영원한 것은 없다>였다.
지금은 물론 구체적인 내용이 기억나질 않지만, 중요한 건 그 소설이 너무 재밌어서 그 이후에 시드니 셀던의 작품을 그다지 많이 읽지도 않아놓고 아직도 나에게 최고의 추리 소설 작가는 시드니 셀던으로 남아있다.
정말로, 영원한 것은 없을까.
한 해가 다 저물어 가는 시점에 항상 하게 되는 후회들이 있다.
나는 왜 연초에 다짐했던 것들을 반도 지키지 못했는가. 야... 진짜 다는 아니더라도, 5할은 해줘야 되는 거 아니냐... 그 호기롭던 마음가짐들은 어디로 갔냐 이 말이야.
아니 뭐,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야 다른 사람들이 얽혀 있으니 내 맘대로 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내가 컨트롤해야만 하는 내 의지와 다짐들도 금세 무너지는데... 영원한 게 어딨어, 진짜.
드라마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늘 드라마를 보면서 어쩌면 영원한 사랑, 영원한 행복, 영원한 부, 영원한 재능과 같은 것들이 있지는 않을까 기대를 하지만, 오히려 그런 건 절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되기도 한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마지막을 보고 허탈하지 않은 시청자가 있었을까.
(tvN/극본 권도은 연출 정지현/김태리, 남주혁, 보나, 최현욱, 이주명 주연)
좀처럼 드라마에 과몰입을 하지 않는 우리 엄마마저도 주인공 나희도(김태리 분)와 백이진(남주혁 분)이 헤어지는 모습을 보며 허무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환갑이 된 아주머니도 허탈해하는 새드엔딩이라니.
물론 이런 결말이 더 현실적일 수도 있다. 결혼할 인연은 따로 있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고,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남친이랑 결혼까지 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도 싶다. 첫사랑이야 말로 영원하지 않은 것들 중에 가장 영원하지 않은 것이겠지만, 그래도 나의 지루한 현실과는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는 게 시청자의 마음인지라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작가에게 응원과 격려(?)를 보내기도 했다.
의사도, 군인도, 외계인도 사랑을 하는 판국에 왜 기자는 사랑을 하지 못하는 거니...
그러니까 도대체 왜, 널 가져야겠다고 호기롭게 외치던 희도는 왜 이진이를 영원이 아니라 그리도 찰나의 순간 동안만 가질 수 있었을까.
그래도 사랑에 대해서는 그리 미련이 남지는 않는다.
원래 드라마에서는 각종 고난을 뚫고도 무조건 이루어지는 게 사랑이고, <오월의 청춘>이나 <옷소매 붉은 끝동>처럼 가끔 내가 원하는 대로 결말이 나오지 않아도 그 나름대로 또 기억에 오래 남으니 만족스러웠다.
영원한 사랑을 믿으면서도 절대 믿지 않는 줏대라고는 없는 나는, 작품마다 다른 사랑의 종류를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렇지만, 진짜 좋아했던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변하는 것을 쿨하게 받아들일 만큼의 면역력은 없었다.
드라마로 6 시즌, 영화로 2편이 나왔던 <섹스앤더시티>는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의 워너비 작품이자 시간이 지나도 오래도록 회자되는 작품 중에 하나이다. 늘 이 작품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넘쳐나기에 작년 HBO에서 <앤 저스트 라이크 댓:섹스 앤 더 시티>를 방영하면서 12년 만에 돌아왔다.
이미 50대가 되어버린 캐리와 친구들의 모습에, 팬들은 박수칠 때 떠나지 않고 왜 다시 돌아왔냐며 한탄스러워하기도 했지만, 그녀들의 모습이 어떻든, 나는 좋아하는 시리즈가 연결된다는 게 꽤 기뻤다.
물론 주인공들의 얼굴에 주름이 확연하게 늘어나고, 이제는 인상마저도 달라져 버렸지만, 그런 건 나에게 크게 상관없었다. 나의 캐리와 친구들이 돌아온다는데, 주름살 정도야, 귀엽지. 나도 늙어가는데, 뭐. 처음 이 시리즈를 정주행 할 때 나는 만으로 19살이었고, 이제는 30대 청년이 되어버렸으니 늙지 않고 계속 그 모습 그대로 인 것이 더 징그러운 게 아닐까. 나도 늙고, 그녀들도 늙고. 아니지,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거라구요.
문제는 늙어버린 그녀들이 아니었다.
<섹스 앤 더 시티> 시리즈의 오랜 팬으로서, 이토록 성의도 없고 개연성도 없는 플롯으로 돌아온 게 너무도 화가 나는 것이다. 98년부터 이어져 온 캐리, 미란다, 샬롯, 사만다의 모든 서사를 깡그리 다 무시하고 아직도 캐리를 명품을 치장한 예쁜 뉴요커로만 표현하려는 그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가 안 되겠어.
첫 화를 보자마자 실제로 눈물을 펑펑 흘렸는데, 뭘 또 그리 유별나게 생각하냐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나에게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줘요... 나 진짜 울었으니까.
충격의 이유를 단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빅이 죽는다.
물론 빅이 왜 캐리와 함께 이 시리즈를 계속할 수 없었는지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충격적이었던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사만다는 아예 등장하지 않고, 스탠포드는 갑자기 일본으로 가버린 후 앤써니는 혼자 남는다. 미란다는 스티브를 버리고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