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만 해도 여름에는 공포영화를 봐야 한다는 공식 아닌 공식이 있었다. 서울에는 비가 쏟아져 난리라지만,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내 고향에서는 며칠 째 폭염이 이어지고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더워서 잠을 못 자는 지경에 이르자 홀린 듯이 무서운 어떤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뭣도 모를 때 나는 <토요미스테리 극장>과 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벌벌 떨었다. 그렇게 무서우면 안 보면 그만인데 굳이 꼬박꼬박 챙겨봤던 어린 날의 나란 아이는 뭘까 참. 무서워서 눈을 뜨지도 못했으면서 <여고괴담>이나 <가위>, <폰>과 같은 영화들을 봤던 나란 아이...
그러나 조금 나이가 들어서는 공포 영화는 거의 보지 않았다. 아니,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라는 걸 알아버렸다 이거예요, 네?
덕분에 공포물보다는 장르물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들이 더 익숙했다. 처음 <추격자>라는 작품을 봤을 때는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 나오는 영화 중에 이것보다 더 무서운 건 없을 것이라 여겼고, 실제로도 그런 듯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캐릭터도 지겨워지곤 했다. 경찰이 나오고 범인을 추적하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널리고 널렸다. 싸이코패스가 나오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여기도 경찰, 저기도 경찰, 그 와중에 사람 죽이는 나쁜 놈, 그 나쁜 놈 이용해 먹는 또 나쁜 놈...
범인을 잡는 건 늘 재밌는 이야기였지만, 어떨 때는 여름 더위만큼 지긋지긋하기도 했다.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까딱 잘못하면 실제로 일어날 것만 같은 초자연적 현상들을 종교와 밀접하게 관련된 모습으로 그려내는 작품들이 있다. 주로 무당이나 영매 혹은 악령이나 초능력 같은 것들이 등장하는데, 우리는 이런 장르를 보통 오컬트라 부른다. 요즘의 나처럼 사람 잔인하게 죽이는 싸이코패스들이 지겨워졌을 때는 이런 장르가 딱이었다.
오컬트는 많은 사람에게 생소한 장르이겠지만, 그것도 이제는 과거형이다. <유전>이나 <미드소마>, <겟아웃>, <오펀 천사의 비밀>과 같이 작품성도 좋으면서 스릴도 느낄 수 있는 외국 작품들은 끊임없이 쏟아지고, 이런 장르만을 찾는 사람도 많아졌다. 나 역시 무섭다면서 어린 날을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역시나 위의 영화들을 다 보고야 말았고, 거기에 더해 요즘은 영화 <검은 사제들>이나 <곡성>과 같이 한국형 오컬트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많아지면서 나와 같은 쫄보들도 점점 이 장르에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특히나 영화 <사바하>는 그래도 천주교보다는 불교가 훨씬 친숙한 나에게는 꽤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동안은 장르의 특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컬트 장르는 주로 영화로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드라마로도 이 장르를 시청할 수 있다.
몇 년 전, <손 the guest>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OCN/극본 권소라, 서재원 연출 김홍선/김동욱, 김재원, 정은채 주연)
물론 공중파 드라마는 아니었고, 케이블 채널이라 대중적이기보다는 마니아 층이 두터운 드라마였다. <검은 사제들>과 같이 구마 의식이 주된 테마였는데, 박일도라는 악귀가 있고, 그 악귀를 잡기 위해 귀신을 느끼는 영매 윤화평(김동욱 분)과 천주교 사제 최윤(김재욱 분), 거기에 형사 강길영(정은채 분)이 합심해 악귀를 잡아가는 내용이다. 언뜻 보면 범인을 쫓는 것 같지만 악귀가 여러 사람에게 빙의해서 다른 사람들을 헤친다는 설정은 영락없는 오컬트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손 the guest>를 보게 된 건 오로지 김동욱 배우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하나씩 따라가며 보는 건 아주 의미 있으면서도 재밌는 일이다. 내가 어떤 배우에게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완전히 부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선호하는 장르가 아닌 작품을 도전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이라는 작품으로 내 인생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김동욱이라는 배우는 장르의 한계가 없이 다양한 작품을 하는 배우라 더욱더 정주행 하는 맛이 나는 배우이다.
그래, 내가 현생에 치여 귀여운데 잘 생겼고, 무엇보다 연기를 기가 막히게 잘하는 이 배우를 잠시 잊고 있었구나. 세상에.
처음에는 이 배우를 보기 위해 늘 그랬던 것처럼 범인 잡는 장르물인 드라마 <돼지의 왕>을 보기 시작했다.
(TVING/극본 탁재영 연출 김대진, 김상우/김동욱, 김성규, 채정안 주연)
<돼지의 왕>은 연상호 감독의 동명 애니메이션이 원작인데, 작은 사회를 상징하는 중학교의 교실을 배경으로 처절한 계급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 경민(김동욱 분)이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아이들을 한 명씩 찾아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처단하는 건 잔인했지만,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우리 나쁜 짓하고 살지 맙시다, 제발.
<돼지의 왕>을 보고 나니 연상호 유니버스를 경험해보라는, 장사를 아주 잘하는 티빙의 홍보에 이끌려 <괴이>라는 작품까지 보게 되었다.
(TVING/극본 연상호, 류영재 연출 장건재/구교환, 신현빈, 김지영 주연)
저주에 걸려 오랜 시간 봉인되어 있던 불상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그 불상의 눈을 보게 된 자들 역시 저주에 걸려 사람을 해치고, 그것을 막기 위해 주인공들은 고군분투한다.
그렇게 괴이를 보고 나니 오컬트 장르에 맛이 든 건지 결국 대놓고 나 '오컬트요'하는 작품을 정주행 하게 되었는데, 그게 <손 the guest>였다.
그리고 여러 작품들을 보면서 느낀 건, 딱 하나였다. 사람을 사람이 죽이건, 귀신이 죽이건 상관없이 모든 공포는 인간 내면의 분노에서 출발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