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드라마 속에서의 사랑한다는 말은 나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현승(로운 분)은 송아(원진아 분)를 사랑한다. 처음부터 그랬다. 송아를 처음 만났던 대학생 때도, 다른 남자를 위해 립스틱을 바를 때도. 현승은 언제라도 송아를 사랑했고, 그 어떤 역경이 있어도 그 사랑을 멈추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먼저 헤어짐을 고했던 송아가 다시 돌아와 아직 좋아한다고, 아직 좋아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을 때 그녀를 선뜻 받아줄 수 없었던 건, 알량한 자존심이 아니라 또다시 그녀가 자신을 버릴까 봐, 한 번 더 상처받으면 정말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까 두려워서가 아니었을까.
그래도 현승은 송아를 안아줄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데 뭐 어쩌겠나요.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는 일반 상식이 있는 걸요. 사랑한다는 송아의 말에 현승의 대답은, 네가 날 아무리 사랑해봤자 나보다 더 사랑할 수 없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진짜 사랑을 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확신. 그리고 시청자는 온전히 그 마음을 전달받는다.
한국 드라마는 늘 멜로가 빠지지 않는다 하여 조롱당해왔다. 드라마 <시그널>이나, <비밀의 숲>, <스토브리그>, <모범택시>와 같은 장르물이 성공을 거둘 때마다 몇몇 사람들은 이제야 진짜 드라마를 본 것 같다고 했다. 병원에서도 사랑하고, 법정에서도 사랑하고, 범인을 잡다가도 사랑에 빠지는 드라마는 이제 너무 지겹다고.
근데 그게 왜? 도대체 왜? 사랑이 왜 나빠?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 멜로 대신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과 영화 <미드 소마>, <유전>을 차례대로 보고 나자 점점 뒷골이 서늘해지고, 무서운 생각들이 들기 시작했다. ...너무 무서워 진짜. 덕분에 이제 진짜 로맨스로 돌아가야겠다 싶었다. 뻔하고 유치하다 하더라도 '사랑'은 여전히 가장 쓰기 좋은 드라마 소재이고, 대중들이 쉽게 받아들이는 장르이기도 하다. 요즘 드라마에서는 직접적으로 사랑을 고백하기보다는 에둘러서 애틋함을 표현하거나 두근거리는 상황만을 던져주곤 한다. 연애보다 썸을 더 설레 하는 요즘 방식의 사랑이 반영된 것일까. 곧바로 사랑한다는 말 없이 명치께가 간질거리는 상황을 묘사한다는 것이 꽤 어려운 일이라 작가들 중에서도 절대 멜로는 못 쓰겠다는 작가들도 많다.
그렇지만 여전히 '사랑해'라는 말은 주인공들의 엇갈리는 마음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시청자에게 엄청난 임팩트를 준다.
드라마 <상속자들>에 나왔던 고백 장면을 아직 많은 이들이 기억할 것이다.
(SBS/극본 김은숙 연출 강신효, 부성철/박신혜, 이민호, 김우빈, 김지원 주연)
미국 동네 건달들에게 쫓기다 영화관으로 도망쳐 들어온 탄(이민호 분)과 은상(박신혜 분). 은상에게 영화 내용을 설명해주던 탄이 말한다.
"나 너 좋아하냐."
드라마를 본방사수할 당시에는 홀린 듯이 빠져 들어 보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 다시 보면 뭔 소리냐 싶은 이 대사는 김은숙 작가 특유의 로코 감성이 잘 드러난 대사이다. 똑같은 좋아한다는 말이라도 절대 평범하게 표현한 적이 없는 이 작가는, 2004년 <파리의 연인>의 '이 안에 너 있다.', 2010년 <시크릿가든>의 '저한테는 이 사람이 김태희고 전도연입니다.'를 거쳐 2013년 <상속자들>에서 '나 너 좋아하냐'를 찍고 2016년 <도깨비>의 '모든 날이 좋았다.'와 2018년 <미스터 션샤인>의 '합시다, 러브'까지 쉼 없이 시청자들을 울고 웃게 만들었다. 덕분에 대한민국에서 김은숙 작가를 빼고 멜로를 논할 수 없게 되었고, 개인이 가진 취향과 관계없이 모든 작가 지망생들이 이 작가처럼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드라마를 만들기를 꿈꾸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얼굴이 변하는 여자가 있다. 그리고, 사람의 얼굴을 구분하지 못하는 남자가 있다. 다른 모습으로 변한 여자를 알아보는 사람은 오직 남자뿐이다. 남자는 얼굴로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 사람이 가진 고유한 무언가를 알아채기 때문이다.
드라마 <뷰티 인사이드>이다.
(JTBC/극본 임메아리 연출 송현욱, 남기훈/서현진, 이민기, 이다희, 안재현 주연)
고백하기를 망설이는 도재(이민기 분)가 말한다.
"키스해놓고 할 말 없냐고 물을 때, 답은 두 가지라던데. 사랑해거나 미안해거나. 미안하단 말은 싫고 그럼 남은 답이 하나라, 그래서 말 못 했습니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내가 이렇게 엉망진창인데."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도재는 차마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미안하다고 하지 못한다. 아니, 미안하다고 하고 싶지는 않다. 세계(서현진 분)를 사랑하는 게 확실하기에.
그런 그에게 세계가 대답한다.
"해요. 해요, 그냥. 나도 엉망이잖아."
어린 아기가 됐다가, 할머니가 되었다가, 심지어 남자가 되기도 하는 그녀는 그래도 용기를 낸다. 엉망인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해줍시다.
그러자 다시 도재가 말한다.
"이 감정에 이름을 정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될 겁니다. 오래도록 안 잊힐 거예요."
걷잡을 수 없게 되어도, 너는 괜찮겠니?
그리고 세계가 다시 대답한다.
"어차피 못 잊어요. 평생 죽어도 못 잊을 거예요. 날 알아봐 준 사람이니까."
사랑한다고.
회사에서도 연애를 하고 학교에서도 연애를 하는 드라마를 욕하는 사람은 앞으로도 쭉 존재할 테지만, 그래도 여전히 '대리 설렘'은 한국 드라마의 의무이다. 한국 드라마 작가들만큼 멜로를 잘 표현하는 예술가는 없을 거라 자부한다. 그리고 늘 그렇듯 무언가를 만들어 내려는 사람들은 기존에 있는 것에 또 다른 것을 더해 높아져만 가는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아야 한다. 사랑만큼 시청자의 마음을 재빨리 흔들 수 있는 소재는 없고, 이미 멜로가 한국 드라마의 디폴트 값이 되어 버렸다면, 이제 작가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은 동백이(공효진 분)와 용식이(강하늘 분)의 사랑 이야기는 기본이고, 거기에 술집을 하는 여자, 아이를 혼자 키우는 여자라는 편견을 깨부수는 이야기를 더했고, 또 한 발 더 나아가 마을 공동체 전체가 까불이라는 공공의 적을 소탕하는 스토리까지 전달했다.
드라마 <빈센조>에서 빈센조(송중기 분)와 홍차영(전여빈 분)은 한 팀이 되어 거대한 악을 물리치는 큰 플롯 아래에서, 동지애를 넘어선 남녀 간의 사랑이 진행된다. 악당을 일말의 동정도 느낄 수 없는 절대 악으로 그려냄으로써, 스포츠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시청자를 빈센조 앤 차영 팀의 일원이 되게 만들고, 적절한 타이밍에 두 주인공이 악인을 벌하는 모습을 보며 주며 쾌감을 선사한다.
살기 힘든 세상이다. 전염병은 2년이 넘게 우리를 괴롭혀 이제는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텍스트로 말하는 게 더 익숙한 비대면 시대가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나라에서는 실제로 전쟁이 터졌다. 도대체, 이 시대에 사랑은 어디로 갔는가.
가끔은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정통 멜로가 그립기도 하다. 눈빛만으로, 작은 손짓 하나만으로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이 그립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사랑이 있다면 모든 것이 괜찮아지기에, 우리는 영원히 멜로를 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