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그냥 흘러가다가 때때로 나쁜 일들이 일어나고, 어쩌다 한 번씩 좋은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평범한 인생에서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보다 이미 받아버린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느냐가 더욱 중요한 일이다.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인들이 미치지 않고 올바른 정신으로 살아가려면 무조건 해소법을 찾아야만 했고, 다행히도 나는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감정이 격해졌을 때는 장문의 일기를 쓰고, 걱정거리가 많을 때는 잠을 자고, 모든 것이 허무해질 때는 무서운 드라마나 영화를 봐야 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아우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바로, 농구장에 가는 것이다.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라더니 조금이라도 신경이 예민해지면 가끔 몸에 이상한 반응들이 일어나곤 했다. 날씨가 쌀쌀해진 순간부터 바로 코에서 비릿한 맛이 나기 시작했다. 환절기마다 코피를 달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여전히 크지 못한 걸까. 더구나 별로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꼴에 글을 쓴다고 노트북 앞에 조금 앉아 있었더니 손목이 아리기 시작했다. 코로나 이전에 일본에서 사 왔던 동전파스를 꺼내 붙이며 고작 이 정도로 몸이 아픈 게 진짜 맞는 건지 한탄스러웠다.
더구나 망할 코로나로 가게 매출에 타격이 생기자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인근 중학교에서 확진자가 꽤 나왔는데, 그중에 몇 명이 내 가게에 다녀가면서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였다. 정신이 없다 없다 이렇게까지 없을 수가 있나 싶은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소독을 해야 해서 갑작스럽게 손님들을 다 쫓아내기도 했고, 확진자의 가까이 앉았다는 이유로 접촉자로 분류되어 졸지에 14일 동안 집에 갇히게 된 손님도 있었다. 2주 동안 나는 PCR 검사를 세 번이나 했고, 면봉을 찌른 코가 아파오는 만큼 짜증이 치솟았다. 돈은 못 벌고 고생만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했지만 별로 소용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현생이 빡빡해지면 가장 먼저 포기하게 되는 것은 '취미'였다. 먹고살기 힘든 와중에 좋아하는 무언가를 한다는 건 생각보다 너무 피곤한 일이었고 피곤함을 극복할 만한 부지런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는 가만히 앉아서 하는 뜨개질 같은 것도 하지 못한 채로 영혼이 메말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나는 지금 농구장에 가야 한다.
이런 느낌은 예전에도 있었다.
2019년 겨울은 특히나 그랬다. 살은 찌고 영혼은 메말라 가던 나날들의 절정이었다. 그때의 나는 우물 안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전문가의 시나리오 수업을 들었었다. 캐리어 하나만 끌고 서울로 올라와 친구 집에 얹혀살던 때였고, 돈이 없는 건 당연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리에 암담한 것은 물론이요,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과연 글쓰기에 소질이 있는 것인가 하는 자기혐오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몸부림치며 좋아했던 소소한 것들을 모두 내려놓은 채로 써지지도 않는 글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나의 심장을 뛰게 했던 건 역시나 농구였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시나리오 수업에서 내가 쓴 이야기가 그리 트렌디하지 않고 여자 주인공은 약간 민폐에 가깝다는 피드백을 들은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스타벅스 6인석에 앉아 노트북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써지지 않아도 뭔가를 써야 했지만 정말 머리가 백지상태였다. 그때, 스타벅스 안으로 내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남자 두 명이 들어왔다.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었는데, 키가 큰, 커도 너무나 큰 남자 둘이었다. 뒷모습만 봤지만 직감적으로 농구선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하철로 한 정거장만 더 가면 농구장이 있었고, 당시 내 친구 주의 집 근처에는 원정 경기를 오는 선수들이 묵을 만한 큰 호텔들이 있었기에 두 남자가 숙소에 짐을 풀고 커피를 사러 온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들이 뒤를 돌았을 때는 더 놀랐다. 둘 다 농구팬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선수였고, 심지어 한 명은 소속팀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선수였다. 농구선수를 연예인처럼 생각했던 나는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고, 오랜만에 '신기하다'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는 밤늦게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편의점으로 달려가다가(안 먹는 생각은 안 함) 또 농구선수와 마주쳤다. 어두워서 반신반의했지만, 농구선수가 아니고서야 설명이 안 되는 다리 길이를 가지고 있어서 확신했다. 이름이 생각나질 않는 걸 보니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선수인 것 같았다. 또 한 번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기운이 가라앉았다.
농구장에 가본 지가 언제였더라.
선수 이름을 모른다는 것도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팀의 평균 출전시간이 채 1분도 되지 않는 선수까지 모두 꿰고 있었는데, 지금은 과연 내가 농구 팬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나 싶었다. 내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니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했던 취미들이 계속 밀려나고 있었다.
왜 이러고 사는 걸까. 그 좋아하던 농구도 안 보고. 뭐 대단한 거 한다고.
그렇게 충동적으로 경기 일정을 검색했다. 그리고 신의 계시를 받았다. 마친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내가 응원하는 팀의 원정경기가 있었다. 고향을 떠나온 이 시점에 바로 옆에서 고향 팀의 경기가 있는데 안 가면 이건 진짜 멍청한 거지. 나에게 소중한 걸 다시 찾으라는 신의 계시를 무시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성향상 어떤 것을 충동적으로 결정하지 못하는 나였지만, 농구 경기를 충동적으로 예매해서 실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도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농구는 '왕년' 인기 스포츠였다. 드라마 <마지막 승부>와 만화 <슬램덩크>로 대변되는 농구대잔치 시절에 그렇게도 인기가 많았다던 농구는 어느샌가 내리막을 걷게 되었고, 나는 그 내리막의 끝에 탑승한 소녀였다. 만약 내가 농구대잔치 시절에 태어났다면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속의 나정이와 같은 열정을 보여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은 몇몇 스타플레이어의 등장으로 다시 인기가 올라가고 있는 추세이긴 하지만, 내가 농구를 좋아했던 지난 15년 동안 언제나 이 스포츠는 '부흥'이라는 과제를 안고 살아가던 종목이었다. 야구가 베이징에서 금메달을 따고 손흥민이 영국에서 월드클래스가 되어가며, 배구가 시청률을 꾸준히 올리는 동안에도 농구는 항상 '이러니까 농구가 망하지.'라는 소리를 듣곤 했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이런 농구가 뭐라고, 왜 내 인생에 이토록 자극을 주는 걸까.
언젠가부터 억지로 열정을 주입하는 것들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그게 어떤 것이든 당신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하라는, 뻔한 말들이 지겨웠다. 쓸데없이 심장이 자꾸 뛰면 부정맥을 의심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구나. 열정이고 나발이고 만사가 귀찮고 피곤하니 그냥 진짜 땀 흘리는 사람에게 내 속에 겨우 남아있는 아주 티끌만 한 열정이라도 다 줘버리자 싶었고, 이것이 내가 아직도 농구를 보는 이유라면 이유였다.
나야 그렇다 치고, 사람들은 왜 스포츠에 열광하는 걸까.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시작되면, 헬조선이라고 욕하던 사람들도 하나같이 대한민국을 외친다. 그래, 스포츠는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힘이 있다. 소속감이라는 건 인간 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같은 편' 그리고 '우리 팀'이라는 소속에서 나오는 안정감을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며 주인공이 잘 되기를 기원하고 악역이 망하기를 기도하는 것 역시 이미 시청자들이 감정 이입을 완료해 주인공과 '우리'라는 범주에 속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스포츠를 소재로 한 드라마와 영화 역시 늘 우리 곁에 있었다. 극적인 순간을 표현하는 데에 스포츠만 한 것이 또 있겠는가. 괜히 운동 경기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1초 사이에 달라지는 승부, 선수의 투지, 요행 없이 흘리는 땀의 가치를 작가들은 드라마 속에 담았고, 그렇게 모든 것이 각본으로 짜인 드라마 속 스포츠 장면들을 우리는 매 순간 사랑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