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효캐리 Nov 03. 2023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할 수 있겠죠. 두 번째.

나를 위로하는 대사들.


<왕좌의 게임>을 본 사람이라면 이 대사를 모를 수 없을 것이다.


"you know nothing, jon snow."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 존 스노우는 장벽 너머의 야만인 이그리트에게 늘 이 말을 듣는다. 넌 아무것도 몰라.

실제로 존 스노우는 시즌 내내 억울한 표정으로 진짜 뭘 알지도 못하면서 눈밭을 헤매고는 갑자기 죽었다 살아나기까지 한다. 누구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왕좌의 게임 세계관에서 이 남자가 마지막 시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주인공이기 때문이라는 말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서브가 아닌 주인공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치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작품을 처음부터 뜯어고쳐야 하는 건지, 아니면 특정 캐릭터만 이상한 것인지, 당선이 되지 않은 게 그저 심사위원의 취향 때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결정적인 한방이 부족했는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고 답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답답해 미쳐버릴 것 같은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생각을 많이 하고 안 써져도 계속 쓰다가 고치고 또 고치는 것뿐이었다. 







사고로 인해 13년을 병원 침대에 누워있다 갑자기 깨어난 여자가 있다. 열일곱에 잠들었는데 서른에 깨어난 것이다.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입곱입니다>이다. 

(SBS/ 극본 조성희  연출 조수원/신혜선, 양세종, 안효섭, 예지원, 정유진 등 주연)


막장 드라마가 난무하는 가운데 억지스러운 악역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13년 만에 깨어나는 게 말이 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 되게 만들면 말이 되는 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더럽게 바쁜 세상 속에서 나 혼자 너무 뒤처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이 드라마의 주인공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주인공 서리(신혜선 분)는 13년을 통째로 날리고 갑자기 서른이 되어 혼란스러워한다. 지금의 자신이 어렵고 낯설다며 울먹인다. 하긴, 좀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열일곱 소녀에서 서른 살의 어른이 되어 있으니 당황스러울 만도 하다. 

... 근데 뭐,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갑자기 나이 들어버린 건 나도 마찬가진데? 나만 그런 거 아니잖아. 다들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서른이 넘어 있었던 거잖아? 누가 이렇게 금방 나이들 줄 알았겠냐고.


"나한테는 지금이 그 시간 같아요. 멋진 다음 무대를 기다리면서 잠시 멈춰 있는 시간. 내 인생의 인터미션. 그래서 괜찮아요. 끝난 게 아니라 잠시 쉬어가는 거니까. 두근두근, 멋진 다음을 기다리면서 잠깐 멈춰 있는 것뿐이니까."


나는 뭔가 일이 안 풀린다는 생각이 들 때 이 대사를 떠올렸다. 얼마나 더 멋진 다음을 주려고 이렇게 힘들게 하나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대체로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진정되곤 했다. 

생각해 보면 뮤지컬을 보러 가서도 나는 언제나 빨리 다음 이야기를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20분의 인터미션동안에 공연이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혹은 재미가 없으면 어떡하지, 와 같은 쓸데없는 생각들은 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을 기다리는 설렘만 있었을 뿐. 

인터미션. 

어쩌면 인생에는 설렘이라는 감정도 있다는 걸 알려주는 시간이 아닐까. 










실제 판사가 극본을 쓴 드라마가 있다. 여러 유형의 판사 캐릭터를 등장시키며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드라마라 아주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다.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다.

(JTBC/ 극본 문유석  연출 곽정환/고아라, 김명수, 성동일, 류덕환, 이엘리야 주연)


주인공 바른(김명수 분)은 철저한 개인주의자였지만, 동료 판사 박차오름(고아라 분)을 만나면서 점점 다른 사람을 둘러보게 되는 사람으로 바뀐다. 오직 사람 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나였기에, 이 캐릭터를 참 좋아했다. 바른은 비단 여자 때문에 바뀌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여자와 함께 하면서 여러 사건들을 겪고 그 덕분에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 간다. 








"아주 잠깐이라도 만난 별들은 그 순간의 기억 때문에 행복하지 않을까. 인간의 기억이란 참 묘해서, 완결된 것은 망각하고 미완의 것은 오래오래 기억한다. 해피엔딩을 이루고는 익숙해져 가는 사랑과 못 이루어 평생 그리워하는 사랑 중에 어느 게 더 달콤할까. 아니, 어느 게 더 슬픈 것일까."


너무 쉽게 이룬 것들은 금방 무뎌진다. 인간의 기억이란 참 묘해서, 익숙해진 모든 것들은 금방 기억의 저편으로 흘려보내 버린다. 그래, 나는 내가 했던 모든 실패를 잊지 않으리. 내 꿈을 향한 나의 사랑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못한 짝사랑이지만, 그래서 더 애틋하고 소중할지도. 짝사랑이면 뭐 어때. 난 진심이야.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아무리 포기하려고 해도 절대 포기가 안 되는 그런 절절한 사랑, 크으, 멋있잖아! 

... 이래서 내가 서브남에 환장하는 건가...?








사실 내가 <왕좌의 게임>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따로 있었다. 


"자신이 누군지 잊지 말게. 세상도 잊지 않을 테니. 그걸 갑옷으로 삼으면 자네가 찔릴 일을 없네."


나는 내가 누군지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무언가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이여,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물론 나는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고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지만, 하나는 명확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이 사실만이 나를 온전하게 위로해 주었고, 다시 일어날 힘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해피엔딩을 맞아 비록 익숙해진 사랑이라 해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하리. 







(모든 사진의 출처는 해당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


이전 05화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할 수 있겠죠. 첫 번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