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느낌표를 찾아서.
망상종자들은 쓸데없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그게 MBTI 'N'형 인간 삶의 낙이요, 전부니까.
수많은 망상 중에서도 내 작품이 TV에 나오는 망상은 정말이지 멈출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심장이 두근거려 혼자 히죽히죽 웃곤 했다. 미친 건 아닙니다. 그냥 상상을 좀 하는 거지. 작가가 그런 상상도 못 하면 무슨 낙으로 글을 쓰겠습니까.
한 가지 분야에서 15년 이상 종사하면 전문가라고 부른다던데 내 망상 경력은 초등학교 시절 인터넷 소설을 읽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쳐도 적어도 20년은 된 수준이니, 나도 이만하면 망상 전문가가 아닐까.
엄마와 등산을 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산이었는데, 주말이면 사람들이 꽤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같이 등산을 가자고 말만 해댄 지 몇 달 만에 같이 가는 등산이었다. 가끔 도대체 다시 내려와야 하는 곳에 왜 올라가느냐 물으면 엄마는,
"산이 거기 있지 때문이지."
라는 철학적인 대답을 내놓곤 했다.... 산이 거기 있으면 뭐, 그게 도대체 왜요.
나는 끝이 없는 것 같은 오르막을 올라가면서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죽은 동료의 시신을 찾으러 가는 영화 <히말라야>를 떠올렸다. 그래, 나는 지금 산악원정대다. 지금 포기하면 나의 소울메이트는 머나먼 타국의 산속 눈밭에 영원히 파묻히고 만다. 한 걸음만 더 가자. 한 걸음만 더!
히말라야와는 비빌 수도 없는 해발 600m의 산이었지만, 가끔 쓸데없이 비장한 것도 도움이 되곤 했다. 망상의 힘을 업고 무사히 정상에 도착했으니 말이다. 물론 평소에 운동이 워낙 부족했던 탓이었는지 단 한 번의 등산으로 미칠듯한 근육통을 얻었지만, 최근 한 일 중 가장 뿌듯한 일이기는 했다.
올라가는 동안, 엄마는 말했다. 인생의 시야를 넓히려면 두 가지 중 하나를 해야 한다고.
그게 우리가 여행을 가는 이유, 등산을 하는 이유라고.
산을 오를수록 내가 볼 수 있는 시야가 달라졌다. 땅에서는 고작 몇 미터만 볼 수 있었던 내 눈은, 중턱에서는 내가 사는 곳을 벗어나 다른 동네까지 볼 수 있었으며, 정상에서는 도시 전체를 볼 수 있었다. 달라지는 시야만큼 내 망상의 깊이도 깊어질 수 있을까, 조금 더 다채로운 생각과 상상을 바탕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드라마 <질투의 화신>은 참신한 소재로 시청자를 사로잡은 작품이었다.
남자가 유방암이라니. 건강검진을 통해 유방 엑스레이를 경험해 본 여성으로서 남자가 이 검사를 받고 진단받는 것이 참으로 신선한 소재로 느껴졌다. 망상을 하려면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데, 쩝.
이 드라마는 어쩌면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감정인 '질투'를 소재로 하고 있기도 하다. 대놓고 남자 두 명이 등장해 서로를 질투하며 여자 주인공의 사랑을 받으려 안달이 난다. 여성 시청자로서는 아주 흐뭇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날 두고 치열하게 싸우는 두 남자, 짜릿해. 늘 새로워.
"나 너 좋아해도 돼? 짝사랑만 할게. 잠깐만 하자. 너도 니 맘대로 했잖아. 넌 정원이 좋아해. 정원이한테 잘해. 내가 너 좋아할게. 짝사랑 한번 받아보고 싶다 그랬잖아. 그러자. 난 물음표 아니고 느낌표야. 그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나처럼 굴어. 신나고 재밌겠다. 고소하겠어. 즐겨. 즐겨라, 넌."
화신(조정석 분)은 질투를 감추지 않는다. 정원(고경표)과 함께 있는 나리(공효진 분)에게 섭섭하지만, 넌 그냥 사랑을 받기만 하라며 기꺼이 서브 역할을 자처한다. 물론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 남자는 서브남이 아닐뿐더러 사랑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이 대사에서 나온, '물음표 아니고 느낌표야.'라는 말은 이전에 나왔던 대사와 연결되는 말이다.
"자기 인생에 물음표 던지지 마. 그냥 느낌표만 딱 던져. 물음표랑 느낌표 섞어서 던지는 건 더 나쁘고, 난 될 거다. 난 될 거다. 이번엔 꼭 될 거다. 느낌표. 알았어?"
앵커가 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나리에게 화신이 하는 말이다. 말처럼 쉽지는 않은 말이다. 고작 해발 600m짜리 산 하나를 올라가는데도 1분마다 한 번씩 내가 진짜 다 올라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으니까 말이다. 나는 내 인생에 얼마나 확신이 있을까. 과연 느낌표를 찾을 수 있을까. 이 모든 질문들마저도 다 물음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망상은 모두 물음표에서 출발한다. 날마다 얼굴이 바뀌면 어떨까? 외계인과 사랑에 빠지면 어떨까? 한강에 괴물이 나타난다면 어떨까? 15년 동안 갇혀 군만두만 먹는다면 어떨까? 하는 모든 망상들은 다 물음표였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느낌표가 된다.
남자가 유방암에 걸리면 어떻게 될까? 에서 출발한 드라마는, 암 환자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쟁취했다!로 끝이 났다.
... 크으, 진짜 멋있다. 나는 이런 멋있는 일을 하는 사람인 거야.
내 인생이 다 셀 수도 없는 수많은 물음표로 뒤덮여 있다고 해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따져보자면, 내 인생 첫 번째 자부심은 우리 엄마의 딸이라는 것이었다. 환갑이 넘었어도 여전히 여행과 등산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히려 노력하는 사람. 그렇게 멋진 사람의 딸이라는 게 가장 큰 자부심이었고, 그다음 자부심이 바로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느낌표만 던지기로 했다.
난, 잘 될 거다! 무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