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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캐리 Dec 01. 2023

흑산이 아닌 자산

이준익 감독을 만나다.

누군가 이준익 감독에게 물었다.


"감독님의 인생에서 흑산이 자산으로 변한 순간이 있었나요?"


감독은 대답했다. 좋든 싫든 자신이 있는 곳을 자산이라 믿노라고.








내 고향 울산은 문화예술이 발달한 곳이 아니었다. 7,80년대 산업화를 대표하는 도시였고, 아직도 많은 사람이 울산 하면 화려한 공장의 불빛을 생각했다. 해마다 국제영화제를 개최하며 예술의 도시가 된 부산과 바로 붙어 있기 때문인 건지 울산은 언제나 문화예술 분야에서 소외당했다. 나조차도 울산에서의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고 그 흔한 뮤지컬을 한 편 볼 때도 부산으로 향했으니 말이다. 강대국 옆에 붙어 있는 소국의 서러움을 부산사람들이 알기나 할까. 

하지만 최근 이 도시는 문화도시로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 노력 중 하나가 바로 <영화감독과 함께하는 영화 이야기>였다. 


나는 유명한 영화감독을 실제로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이 행사에 참여했다. 많은 사람이 이준익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다. 천만 관객이 넘은 <왕의 남자>는 말할 것도 없고 <황산벌>, <라디오 스타>, <사도> 그리고, <동주>와 <자산어보>까지, 이 감독의 거의 모든 작품이 사랑받았고, 나도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자산어보>는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된 정약전이 그곳에서 청년 창대를 만나 함께 자산어보라는 책을 써 내려가는 이야기이다. 소극장에 모인 사람들은 꽤 집중해서 영화를 감상했다. 이렇게 대감독을 모셔 놓고 100명도 안 되는, 사실은 오십 명이 채 될까 말까 한 사람들이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영화를 보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문화도시로 탈바꿈하고자 하는 첫 노력이니 이만하면 봐주자 싶은 마음도 있었다.








정약전이 써낸 책의 이름은 '흑산어보'가 아니라 '자산어보'이다. 흑산이 자산으로 바뀐 것이다. 정약전은 흑산이 무섭다고 말한다. 어딘가 암울하고 음침하다고. 그래서 흑산을 자산이라 부른다. 영화가 끝난 후 GV에서 감독은 자산의 뜻에 대해 말해주었다. 흑색은 말 그대로 검은색을 말하는 것이지만, 자산은 같은 검정이라도 빨강, 노랑, 파랑을 섞어 만들어 낸 짙은 색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흑은 무섭지만, 자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색이 섞이듯, 양반과 상놈이 한데 어우러져 사는 인간적인 섬인 것이다. 


영화 후반부, 부정부패에 환멸을 느낀 창대는 결국 흑산으로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예전의 흑산이 아니다. 이제는 자산이 된 곳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흑백영화가 컬러 영화로 바뀌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구나 흑산에서 자산으로 갈 때가 있다. 인생의 전환점이 있기 마련이다. 한 관객이 이준익 감독에게 언제 자산으로 갔냐고 물었다. 이 감독은 영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정말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다고 한다. 어떤 분야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너무도 엉망진창이고 불합리한 곳에서 일했다고. 그러다 영화판으로 들어오니 신세계가 따로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생각해 보면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의 영화판도 (그의 표현에 따르면) 개판이었다고 한다. 영화인들의 인권이나 노동권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으며, 시스템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감독은 너무도 행복했었다고 말했다. 이준익 감독의 서글서글한 미소에서 그때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남들은 다 엉망이라고 욕해도 자산이라고 느끼면 그곳은 자산이다. 

언제 어느 자리에 있든 내가 이곳을 자산이라 믿으면 그곳이 자산이 된다는 것이다.






이 감독은 딱히 연기에 대한 디렉팅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알아서 다 잘하는 사람들이고, 배우들도 자기 이름값 걸고 하는 일인데, 감독이라고 함부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키야, 저렇게 유명한 감독도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지는 않는구나. 자기 작품이라고 모든 것을 주무르려 하지 않는구나. 역시 영화든 드라마든 모두 협업이고 독단적인 결정으로 만들 수 있는 건 없었다.


물론 이준익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고작 1시간 30분의 GV로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 때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만드는지는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어른의 말을 듣는 건 의미 있는 말이다. 물론 '꼰대'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어른이 하는 모든 말을 쓸데없는 잔소리로 치부해 버리는 시대가 되어버렸지만, 어른이 들려주는 말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이준익이라는 어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기로 했다. 지금도 대감독이 아니라 동네 아저씨 같은 그의 미소가 생각난다.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꼭 말해주고 싶다. 문화 불모지인 울산에서 당신을 만났었다고. 나는 서울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부산만큼 유명하지 않은 이 도시를 흑산이라 여기며 늘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었지만, 당신을 만났던 그 순간부터 내 고향은 나에게 자산이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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