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우정에는 나이도, 국경도 없다. 하지만 성별은 있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있나요?"
이 질문은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흘러도 여전히 논쟁이 될 것이다. 물론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있다. 내가 말하는 친구는 가끔(진짜 가끔) 만나서 밥 먹고 수다 떨다가 다음에 술 한 번 먹자는 말을 진심이 아니라 그냥 인사처럼 하는, 그런 사이를 말하는 것이다. 좋은 동료, 지인 등등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매일 연락을 주고받고, 무슨 일이 났다 하면 바로 달려오고, 매일 같이 서로를 놀려대며 웃고, 상대방이 괜히 다른 사람과 있으면 신경이 쓰이는 그런 사이는,
절대 친구가 아니다.
위장 남사친, 위장 여사친이라는 말도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친구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혹은 벗어나기 싫어서 위장 작전을 쓰는 사람들은 드라마 속에도 꼭 있다.
'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설정은 꽤나 진부하지만, 답이 없기 때문에 계속 사용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랑과 우정 사이의 결말은 대체로 사랑이었다.
그런 거 있잖아요. 누가 봐도 사랑인데 지들만 모르는 그런 건데, 그러다가 갑자기 라이벌이 등장하고 각성한 후에 고백을 날려버리는 그런 거. 뭐야, 그럼 결국 남녀 사이에 친구란 건 없는 게 아닐까?
동만과 애라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친구다. 남사친 여사친을 소재로 하는 모든 드라마가 대체로 그렇다. 아주 어릴 때부터 친구, 주인공들은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사랑을 이룰 수 있다. 애라에게 동만은 친구이자 부하이자 아빠였고, 최종적으로 사랑이었다. 드라마 쌈마이웨이 속 내용이다.
(KBS/극본 임상춘 연출 이나정, 김동휘/김지원, 박서준, 안재홍, 송하윤 주연)
청춘들의 꿈과 사랑은 언제나 좋은 드라마 소재이다. 동만과 애라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청년이었고, 자신의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서로를 인간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사랑했다.
미취학 아동 때부터 봐오던 남자를 이성적으로 좋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해 본 적이 있다. 물론 나는 그런 남사친 따위가 없지만, 없는데도 안 될 것 같은데, 그런 남자가 있다면 진짜... 사귈 수 있다고?
드라마 <치즈인더트랩>의 서브 커플 또한 친구라는 장벽을 극복한 사람들이다.
(tvN/극본 김남희, 고선희, 전영신 연출 이윤정/김고은, 박해진, 서강준, 이성경 등 주연)
물론 은택(남주혁 분)은 처음부터 사랑이라고 확신했지만, 보라(박민지 분)는 망설였다. 좋은 인연을 잃기 싫다는 마음에서였다. 사귀면 헤어지게 되고, 헤어지면 다시는 못 보게 되니까 사귀기 싫다는 것이었다. 뭔 소린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아무튼 그렇단다. 보라가 하는 생각은 드라마에서 언제나 친구 그 이상을 뛰어넘지 못하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핑곗거리이다. 소위 '널 잃고 싶지 않아' 마인드.
그런 보라에게 은택은 말한다.
"그럼 내가 다른 여자 만나도 돼요? 우리가 친구라는 건 앞으로 계속 친구처럼 지낸다는 건 그런 뜻이에요. 나는 누나 말고 다른 여자를, 그리고 누나는 다른 남자와 사귀게 된다는 그런 뜻이라고요. 정말 괜찮아요?"
야... 괜찮겠냐고.
보라 역시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괜찮지 않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랑 사귄다? 그건 못 참지. 절대 안 괜찮지. 질투는 사랑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첫 번째 요소일지도.
잃기 싫어서 사귀지 못하는 친구 사이가 또 있다. 드라마 <사운드트랙#1>의 은수와 선우다.
(디즈니플러스/극본 안새봄 연출 김희원/한소희, 박형식 주연)
선우(박형식 분)는 위장 남사친이다. 좋아하면서, 안 좋아하는 척에는 도가 텄다. 그 세월은 헤아릴 수도 없다. 이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되는 데는 역시나 질투의 힘이 컸다. 은수(한소희 분)는 선우를 좋아하는 여자 후배가 자꾸 거슬린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 그냥... 꼴 보기가 싫어요.
짝사랑을 다룬 여느 작품들이 그렇듯이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언제나 나만 모른다. 은수도 마찬가지다. 주변 사람 모두 선우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아는데, 은수는 그가 자신을 떠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나서야 그 사랑을 알게 된다. 원래 남의 인생에 훈수는 잘 두지만 정작 지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르는 게 인간이라는 생명체 아니겠습니까.
<사운드트랙#1>의 선우가 위장 남사친의 대표적인 예라면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들의 새이(박지현 분) 위장 여사친의 대표적인 예이다.
(tvN/극본 송재정, 김윤주, 김경란 연출 이상엽/김고은, 안보현, 박진영 등 주연)
새이는 누가 봐도 웅이(안보현 분)와 자신 사이의 선을 넘나 든다. 나 갖기는 싫은데 남주기는 아까워서 애매하게 다리를 걸쳐 놓고 어장에 남자를 키우는 나쁜 년이다. 웅이도 그걸 아는 것 같지만, 말끔히 새이를 밀어내지 못한다. 환장할 노릇이다, 정말.
유미 입장에선 어떨 때는 웅이도 즐기는 건 아닌지 의심까지 든다. 우리는 나의 현남친의 여사친이 내 전남친의 현여친이 되는 거지 같은 상황을 너무 많이 목격해 왔다. 유미(김고은 분)가 새이를 보며 느끼는 불쾌함, 불편함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인류 데이터에 축적된 위기 상황에 맞닥뜨렸기에 새이가 싫은 거다.
유미와 웅이는 결국 헤어짐을 마주한다. 유미의 판사 세포는 결국 사랑 세포에게 이별 카드를 소지하라고 판결한다(설정이 너무 귀엽다 진짜). 진짜 헤어지기 직전에 유미는 말한다.
"나는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이 말은 해야겠어. 네 눈에는 안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저 사람은 네가 감싸줄 만한 좋은 동료도 좋은 친구도 아닌 것 같아. 저런 사람을 곁에 두지 마 웅아. 너는 좋은 사람이잖아."
유미는 절대 그 여자와 만나지도 말고, 연락도 하지 말라고 떼쓰지 않았다. 떼쓰며 매달려 봤자 결국 상처받는 건 자신이라는 걸 깨달은 걸까.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좋아하는 남자에게 꼭 이 말은 해주고 싶었다. 친구인 척하며 니 인생을 갉아먹는 사람을 가까이 두지 말라고. 그 말에 웅이는 새이를 버리고 유미를 안아준다. 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지지 않는다. 적어도 위장 여사친 때문에는.
위장 남사친, 여사친이 판치는 세상에 실제로 진정한 친구인 남녀들도 많았다. 이성적인 호감과 인간적인 호감은 어디서부터 달라지는 걸까.
글을 쓰다 보면 이미 존재하는 단어를 다시 정의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친구란 건 뭘까. 사랑은 또 뭘까. 청춘은 뭘까.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는 뭘까. 어디까지 우정이고, 어디서부터 사랑일까. 우정도, 사랑도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호감을 바탕으로 하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갈라져 다른 결말을 만드는 걸까.
물론 내 작품에도 남사친은 존재했다. 진짜 친구인 것도 있고 위장 남사친도 있었다. 나는 그 애매한 기준을 넘을 듯 말 듯 애태우며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를 생각하다가도, 남녀가 진짜 친구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또 다른 결말을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내 작품 속에서 쌈과 썸, 그 애매함 속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또다시 희열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