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는 바람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져 이제 진짜 여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봄은 정신없이 지나갔고, 그동안 나는 또 사이버대 한 학기를 마쳤다. 방학이 시작되었고, 모든 핑계를 다 없애고 다시 본업인 작가지망생으로 돌아와야 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정신없이 수업을 듣고 일을 하며 공모전을 준비하는 동안 <눈물의 여왕>이라는 드라마가 크게 히트했다. 이 작품은 tv드라마가 시청률이 아무리 안 나온다고 해도 재밌게 만들면 여전히 20퍼센트가 넘는 시청률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드라마였다. 물론 결말이나 전개에 대한 호불호가 있기는 했지만, 그런 여론 역시 인기가 없으면 나올 수는 없는 것이었다.
희한하게 시청률은 5%대였지만, 미친 영향력을 끼친 드라마도 한편 있었는데, 그게 바로 <선재 업고 튀어>였다. (tvN/극본 이시은 연출 윤종호, 김태엽/김혜윤, 변우석, 송건희 등 주연)
드라마가 성공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잘 짜인 대본과 연출, 배우의 연기력, 매력, 뭐 그런 뻔한 요소들 말고 진짜 중요한 요인은 뭘까. 시청률이 5%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전국이 선재로 들끓은 이유는 뭘까. SNS를 타고 유명해진 작품이라는 걸 감안해도 완벽히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내가 인스타그램을 사용한 지도 어느덧 10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나온 드라마가 몇 편인데, 왜 이 드라마만 이렇게 난리인 건지 너무도 궁금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 밤을 새우며 고민해 봤지만, 정답을 찾을 순 없었다. 그래,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고.
변우석이라는 배우가 캐스팅되기까지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변우석 이전에 이 작품을 제안받았던 다른 배우들이 그저 그런 하이틴 로맨스물이라고 생각해 모두 거절했고, 결국 이 엄청난 작품은 10년 동안 무명이었던 배우에게 돌아갔다.
분명 변우석이라는 배우가 가진 매력이 이 드라마의 성공 요인 중 하나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특히나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나만 사랑해 주는 잘생긴, 그 와중에 피지컬이 기가 막힌 순정남을 너무도 잘 표현했다. 데뷔 10년 만에 자신에게 맞는 역할을 찾았다고 밖에는 표현하지 못하겠다.
나는 <선재업고튀어>를 보며 나의 아이돌을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부터 좋아했던 나의 아이돌을 마음에 품은 지 벌써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지금도 '두준업고튀어'가 너무도 절실한 것이다. 뭐, 누구나 그런 존재 하나쯤은 있잖아요?
나도 늙고 그도 늙고, 우리 모두 나이 들어갔지만, 나는 TV 속의 그를 볼 때마다 내가 아직 19살의 소녀라고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나에게 영원한 오빠였고, 그를 좋아하는 마음은 늘 어린아이 같았으니까.
지난 5월은 나에게 특별했다. 15년 만에 처음으로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콘서트 한 번에 티켓값, 기차표값에 이런저런 비용으로 꽤 많은 돈이 들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19살의 소녀가 아니었고, 이제 콘서트 한 번 정도는 볼만한 여유가 생긴 30대였다.
험난했던 티켓팅을 성공하고 자랑삼아 대학 동기들에게 드디어 콘서트를 가게 되었다고 전했을 때, 한 친구는 둘째 아이 임신 소식을 전했다. 나는 이상한 괴리감과 민망함을 느껴 얼른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콘서트 이야기는 다시 꺼내지 않았다. 누구는 벌써 아이가 둘인데, 단 하루 콘서트에 몇 십만 원을 쓰는 나는, 잘못 살고 있는 걸까. 그래, 어느새 나는 아이돌 가수를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나이가 되었구나. 나는 그렇게 애매한 어른이 되었구나. 이런 생각이 드니 조금은 착잡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의 착잡함을 달래기엔 또 덕질만 한 게 없었다.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미소를 띠게 하는 것이 스타였다. 그의 미소 단 한 번에 나는 또 녹아요. 녹아...
나는 또 언젠간 내가 진짜 작가가 되면 내 드라마의 첫 주인공으로 꼭 윤두준이라는 배우를 선택할 것이라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내 주위의 친구들은 하나둘씩 결혼을 했다. 아이를 낳은 친구도 여럿이었다. 나는 내가 느리다는 걸 어느 순간부터 그냥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직은 젊은 나이라고, 벌써 결혼하는 애들이 그냥 빠른 거라고 생각하고 말았지만,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내가 느린 거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별다른 위기의식을 느끼지는 않았다. 연애는 여전히 어려운 분야였고, 그리 열정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결혼은 더더욱 그랬다. 지금도 왜 결혼이 좋은 건지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래, 애둘맘이 있으면 아이돌맘이 있는 거지. 그게 뭐 이상한가. 어쩌라고요. 내 돈 주고 내가 공연 좀 본다는데. 인생 뭐 별 거 있습니까. 잘생긴 얼굴이나 보며 힐링하는 거지. 철없어 보여도 어쩔 수 없었다. 이게 나고, 내가 좋아하는 걸 다 하고 죽자는 것이 나의 인생 가치관이었으니까.
<선재 업고 튀어>는 첫사랑을 소재로 하여 하이틴 로맨스를 버무린, 거기에다 타임슬립과 범죄 스릴러까지 끼얹은 작품이다. 복잡해 보이지만 관통하는 메시지는 단 하나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나게 되어있고, 기억을 지워도 사랑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
나는 그 메시지가 좋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고귀하고도 슬픈 일이다. 솔과 선재는 서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서로를 사랑했다. 연애니 결혼이니 이딴 건 다 관심 없었지만, 그 슬프고도 고귀한 감정을 느껴보고는 싶었다. 그리고 그 감정을 모두 내 작품에 쏟아내고 싶었다. 나는 비록 애매한 어른으로 성장했지만, 내가 가진 사랑에 대한 가치관, 15년 동안 한 가수를 좋아하는 순정,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히는 드라마를 만들고자 하는 나의 열정이 나의 작품을 만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