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거짓말을 수습하려면 또 다른 거짓말 7개를 해야 한다고 한다. 안나, 아니 유미는 아주 사소한 하나의 거짓말을 들키지 않으려다 결국 인생 자체가 거짓이 되고 만다.
대체로 모든 거짓말은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라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드라마 <안나> 속의 유미도 마찬가지였다.
(쿠팡플레이/극본, 연출 이주영/배수지, 정은채, 김준한, 박예영 주연)
유미(배수지 분)는 그저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 아빠의 마음을 아프고 하고 싶지 않아서, 도저히 대학에 떨어졌다고 말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붙었다고 '잠깐' 거짓말한다. 어차피 내년에 또 시험을 봐서 진짜 그 대학에 가면 되니까. 영원히 모든 사람들을 속일 생각은 없었다.
유미의 인생은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걸까.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과의 연애부터는 아니었을까.
성인과 미성년자, 선생과 학생. 당연히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만남이었다. 유미는 그걸 몰랐을까. 아마도 알고 있었지만 진짜 사랑이라고 믿었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하지만 선생님은 달랐다. 유미와의 연애를 들키자 어떻게든 학생과의 불장난에 대한 잘못을 상대에게 떠넘기려 했다. 그렇게 유미는 배신당했고, 버림받았다.
하지만 그 상처 때문에 인생이 꼬였다고 말하기에는 유미에게는 바로 잡을 기회가 너무도 많았다. 대학에 붙었다는 거짓말을 한 후에도 진짜 열심히 공부할 기회는 충분히 있었고, 가짜 대학생이라는 걸 들킨 후에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안나라는 이름을 훔친 후에도 굳이 최지훈(김준한 분)과 결혼까지 하지는 않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다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다 날려버린 건 유미 본인이었다.
드라마 <안나> 속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람들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씁니다."
내 일기장에는 어떤 거짓말이 적혀 있을까.
나는 주로 내 일기장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다짐을 적곤 했다. 예를 들면 다음 달까지 5kg 빼기라든지, 매일매일 책 읽기라든지, 아니면 조금만 먹기와 같은 다짐들이었다. 결국 언제나처럼 지켜지지 못한 다짐들은 모두 거짓말이 되어버렸다. ...내가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못 지킨 거지.
어떤 날은 다른 사람에게 말로 표현하지 못할 분노나 슬픔을 적어 내려가기도 했다. 손이 아려올 정도로 풀어낸 감정들은 내 일기장에 처박혀 현실의 내가 조금은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일기를 다시 꺼낼 볼 수는 없었다. 내가 느낀 감정이지만 너무 적나라하고 뾰족해서 나조차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왜 화가 났는지도 모르는 일 때문에 느꼈던 감정들은 나에게 적지 않은 부끄러움을 가져다주었다.
사람은 꿈꾸는 대로 살게 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는 내 일기장에 내 꿈을 적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꼭 공모전에 당선되게 해 주세요.'와 같은 꿈은 아니었다. 주로 '공모전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해 주세요.'와 같은 것이었다. 일종의 다짐과도 같은 꿈들은 역시나 모두 거짓말이 된 적이 많았고, 그로 인해 자괴감을 느끼는 순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는 없는 꿈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작가는 화려한 조명 아래서 작품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라, 고독한 방에서 머리를 쥐어짜 내며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는 사람이었으므로, 나는 언제나 글을 쓸 때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알지도 못하는 신들에게 빌곤 했다.
모두의 인생에는 거짓말이 있다. 한 번도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거짓말은 누구도 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걸 알기 때문에.
거짓의 말이 꼭 나쁜 건 아니다. 드라마 속에서는 의도치 않은 거짓말로 주인공들의 관계가 진전되는 경우도 있고, 들키지 않으려 주인공이 노력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심화되며 극이 더욱 재밌어지는 경우도 많다. 혹은 거짓말을 들킨 순간 분위기가 반전되며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만나는 범인 찾는 이야기 역시 큰 틀에서는 거짓을 밝혀내는 과정이다.
로맨스 장르에서의 거짓말은 어쩌면 필수적인 요소인지도 모른다. 안 좋아하는 척, 안 설렌 척, 질투 안 하는 척 등등 이 모든 상황은 시청자를 답답하게도 만들지만, 사랑이 이루어질 때쯤엔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준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질투에 눈이 멀어 갑자기 좋아한다고 소리치거나 아니면 뭐, 다시는 못 보는 상황이 되어서야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실은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런 거요. ...너무 재밌잖아.
나의 사랑, 너의 사랑, 우리의 사랑인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은 무려 성별을 속이는데, 그 거짓말은 결국은 이 드라마의 핵심 주제로 이어진다. 남자여도, 외계인이어도, 그 어떤 모습이어도 사랑은 시작될 수밖에 없다는 것.
드라마 <무인도의 디바>에서는 아예 이름을 바꾼다. 첫사랑이자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던 남자는 이름을 바꾸고 다른 사람인 척하며 여자를 지키려 했고, 여자 역시 남자가 어렸을 적 그 아이라는 것을 알지만, 남자를 지키기 위해 모른척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두 사람 모두 모든 진실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마음껏 사랑한다.
드라마 <안나> 속의 유미는 결국 다 잃고, 혹은 다 버리고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아간다. <커피프린스 1호점> 속 한결과 은찬, 그리고 <무인도의 디바> 속 목하와 보걸은 많은 역경을 뚫고 서로를 사랑한다. 거짓말은 파멸이 될 수도 있고, 견고한 사랑을 만들어주는 초석이 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