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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캐리 Oct 11. 2024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되었고,

나의 상상도 현실이 되겠지.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속의 월터 미티는 언제나 상상을 한다. 어떨 때는 히어로가 되었다가 어떨 때는 로맨시스트 되기도 한다. 나도 상상을 한다. 어떨 때는 모두가 존경하는 영화감독이 되기도 했고, 어떨 때는 아이 둘 뒷바라지에 힘 쏟는 강남 엄마가 되기도 했다. 








만 60세가 되어 정년퇴직을 한 엄마는 곧장 스위스로 트래킹 여행을 떠났다. 8박 10일의 타이트한 일정 후, 돌아와서 이틀을 앓아누웠지만, 카톡 프로필 사진을 융프라우 앞에서 찍은 사진으로 바꾸고 한참을 쳐다봤다. 엄마는 그곳에 또 가고 싶어 했다. 

설산을 지겹도록 보고 왔을 텐데도 엄마는 며칠 동안 <히말라야>, <노스페이스>, <k2>와 같은 산악 영화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마운틴 퀸 락파 셰르파>까지 연달아 봤다. 대체로 어렵게 산을 오르고 더 어렵게 내려오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엄마는 영화를 보며 연신, 대단하다. 멋있다는 말을 반복했다.

... 죄송합니다 어머니. 식견이 좁은 여식은 뭐가 대단하고 멋있는지 1도 모르겠습니다.


자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곁에 두고 함께하는 것이라 했거늘, 꼭대기에 오르려는 인간의 욕심에 벌이라도 내리려는 듯 산은 실제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나는 설산을 오르는 사람이 나오는 영화를 보며 인간의 욕망은 정말로 현실이 될 수 있는 건지 생각했다. 








그렇고 그런 타임슬립 이야기가 너무 지겨워서 진짜 타임머신 개발에 성공한 괴짜 과학자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인적인 힘에 의해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넘나드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그러다 문득, 타임머신이라는 걸 진짜 만들 수 있는 건지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본투비 뼈문과인 나는 물리학과 관련한 그 어떤 지식도 없었으므로 답을 알 수는 없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상대성 이론>이라는 오래된 과학 서적이었다.


아이뉴턴에서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출판물이었는데, 언젠가 엄마 아들이 보다가 그대로 놓고 간 아주 오래된 책이었다. 잡지처럼 생긴 크고 얇은 책 속에는 상대성 이론을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 한 노력이 가득했다. 물론 나는 상대성이론이 타임머신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몰랐고, 읽어도 뭔 소린지 반 이상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참에 상식이나 채우자라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읽었다. 그리고 타임머신을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는 더욱더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저는 뭐... 물리학보다는 공자, 맹자... 이런 거 좋아했어요. 


결국 책 주인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오빠는 타임머신을 만들 수 있냐는 나의 질문에 단칼에, '아니.'라고 말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해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나의 바람 아닌 바람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다. 왜 못 만드냐는 말에 오빠는 말했다. 

이 세상에 빛보다 빠른 건 없어. 그래서 못 만들어.


오빠는 그 이후로도 만약 우리가 빛보다 빠른 어떤 것을 만들 수 있다면(절대로 그럴 수 없지만),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떻게 과거를 볼 수 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역시나 뭔 소린지 반 이상은 알아듣지 못했다. 어쨌든 결론은 타임머신이라는 건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의 물체일 뿐이고, 만약 내가 빛보다 빠르다면 과거를 잠깐 관찰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한 공간에 있는 건 어떤 가정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 과학이 이런 식으로 작가 뒤통수를 쳐도 되는 거야?







상상력은 인간이 가진 고유의 능력이다. 상상할 수 있기에 모든 것을 만들 수 있고, 상상할 수 있기에 너무 두렵기도 하다. 

월터는 현실에서 정리해고의 위기에 처했고, 자신의 마지막 일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상 속에서 그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당당하게 고백하고 하늘을 날아 미션을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일상 속에서 아무런 제재도 없이 곧장 상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월터의 모습을 보고 혹시 나도 저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초점을 잃고 멍하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듯할 때도 늘 내 머릿속에는 대서사시의 한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 낸 인물이 내가 생각해 낸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창조한 그 장면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벗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재밌는 걸 왜 안 하는데요. 왜 안 해야 되는데요. 안 그래요?


하지만 나도 두려울 때가 있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현실로 돌아올 때 그 허무함, 허망함, 자괴감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 나 자신을 위로하기엔 너무 어리고 서툴렀다. 그럼에도 내가 상상을 멈출 수 없는 건 언젠간 나의 모든 장면이 현실이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월터는 불과 얼마 전까지 소개팅 사이트에 적을 이력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며칠 만에 히말라야도 가고 헬기에서 바다로 번지점프하는 사람이 되며, 화산을 피해 달아난 사람이 된다. 그리고 결국은 사랑하는 그녀와 손을 잡고 길을 걷는다. 

삶의 궤적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타임머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미래를 보고 올 수도, 과거로 돌아가 현실을 바꿀 수도 없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그러면서 나의 상상을 하나씩 실현해 나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내가 빛보다 빨라질 수는 없다 해도 당장 내일 갑자기 비행기를 타고 저 먼 곳으로 떠나 히말라야를 오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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