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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캐리 Oct 23. 2021

현수가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우리가 작가가 될 수 있는 이유.

시간이 지날수록 높은 퀄리티를 자랑하는 의학 드라마나 법정 드라마와 같은 각종 장르물이 쏟아지고 있다. <오징어 게임>, <DP>, <마이네임>등의 넷플릭스 드라마는 공중파의 한계를 뛰어넘은 플롯과 미장센을 보여주며 큰 인기를 끌고 한국 드라마의 세계화를 이루어내었다. 그동안 드라마에서 일컬어지는 한류가 아시아에서만 소통되는 말이었다면, 이제는 정말 전 세계가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좋은 작품을 볼 때마다 시청자로서 희열을 느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가 지망생으로서는 좌절감을 느끼곤 했다. 도저히 내가 가진 능력과 예술적 감각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작품들을 마주할 때마다, 역시나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가 의문스러워졌다. 드라마를 좋아했지만,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장르였다. 



 





미국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를 볼 때였다. 

드라마가 시작할 때마다 격언을 내레이션으로 깔며 시작하는 이 드라마에서, 셰익스피어가 말한 한 문장을 소개할 때,  심장은 덜컥하고 떨어졌다.


'Nothing is so common as the wish to be remarkable.'


이 문장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뛰어난 것이 되고 싶은 것만큼 흔한 것도 없다.'이지만, 드라마에서 제공한(왓차플레이에서 제공한) 해석은 이렇다. 


'뛰어나고 싶다는 소망을 갖는 것이 바로 평범하다는 방증이다.'


그 자막을 보고 나는, 내가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정말, 매일매일 너무나도 특별해지고 싶었으므로. 

작가라는 거창한 꿈을 꾸기 전에도 언제나 내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남들이 사는 것처럼 적당한 학교, 적당한 직장 다니며 적당히 늙어갈 인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수능을 두 번이나 망치고, 서울에 있는 대학 문턱도 바라보지 못했을 때도 그랬다. 내가 그저 공부 따위에 소질이 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 공부를 잘하는 것도 이상하지, 안타까운 사건으로 실어증에 여자와 동네 건달의 사랑 이야기 따위를 상상하던 중학생 소녀였을 뿐인데. 취업에 계속 실패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원서를 넣는 족족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가 가진 스펙에 비해 너무 과도하게 큰 회사를 선택했기 때문이었지만, 나는 당연히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위로의 달인답게 그냥 나 같은 인재를 못 알아보는 등신 같은 회사들이라 속으로 욕을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20대 중반이 되도록 뚜렷하게 나만의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하고 남들과 비슷비슷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모멸감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작가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꿈을 꿀 때는, 그러니까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아주 평범한 인간일 뿐이고 어떤 면에서는 평범보다도 조금 떨어진다는 것을. 







2019년 겨울, 처음으로 작법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내가 쓴 이야기는 갈등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뻔한 스토리였다. 작법 책에 나오는 전문 용어로는 프로타고니스트(주인공)와 안타고니스트(적대자) 간의 갈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심하고 무난하며 별 볼 일 없는 나의 인생사가 내 글에도 투영되고 있는 것 같아 절망스러웠다. 인생에 굴곡이랄 게 없는데, 생각을 굴곡 있게 한다는 건 참, 힘든 일이었다. 

내 글에 문제점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스스로 글쓰기에 재능이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르가 그랬던가,


"신이시여. 제가 음악으로 찬미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면, 왜 내 몸을 좀 먹는 열망을 심어 주셨습니까. 그러면서 왜 재능은 주지 않으십니까."


사실, 살리에르는 옆에 진짜 괴물 같은 천재가 있었다는 게 그의 인생을 좀 먹는 원인이었지만, 모두 알다시피 살리에르 그 역시 천재다. 살리에르 같은 천재도 자신이 재능이 없다는 생각에 평생을 힘들어하는데 나 같은 보통 중에서도 보통인 사람은 오죽하랴. 난 내가 가진 꿈에 대한 열망이 나 자신을 갉아먹고 있음을 글을 쓸 때마다 느꼈다. 재능 없는 꿈을 내가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막막했다.

웹소설이 얼마나 팔렸는지 확인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한 수치를 알 수는 없었지만 대충이나마 어느 정도의 독자가 내 소설을 구매했는지 늘 짐작해보곤 했다. 사람들이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솔직히 관심이 없었다. 단지 내가 글을 써서 얼마를 벌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내 소설이 나에게 쥐꼬리의 꼬리만큼의 돈만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게 분명해졌을 때 난 내 재능에 대해 또 한 번 의심했다. 정말, 난 아직도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걸까. 너무 깊게 잠들어버려 그 누구도 깨우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엄마마저 꿈속을 헤엄치고 있는 나를 차마 깨우지 못하고 돈을 잘 벌고 있는 남의 자식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스스로 이 꿈에서 깨어나길 바라는 게 아닐까. 나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그냥 지망생인 채로, 그래도 아직은 뭔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채로 시간이 멈추길 바랐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내가 꿈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직업이 작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국 드라마 <SEX AND THE CITY>의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는 잡지에 칼럼을 연재하는 작가이며 나중에 그 칼럼의 조각들을 모아 책을 출간하기도 한다. 그녀의 가장 친구 사만다는 그녀에게 말한다.


"넌 지적 자극이 넘치는 흥미진진한 직업도 있고, 널 위한 성대한 기념회도 열리잖아."


'지적 자극이 넘치는 흥미진진한 직업' 

그 말이 나를 벗어나지 못하게 한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다. 생각해보면 이게 다 <사랑의 온도> 때문이다. 

(SBS/ 극본 서명희  연출 남건/ 서현진, 양세종, 김재욱, 조보아 주연)

극 중 현수(서현진 분)는 직장을 때려치우고 보조작가로 일하며 공모전에 글을 내는데, 그게 보조작가에서 잘리는 그 시점에 기가 막히게 당선이 된다. 현수의 시련은 사랑에 온도차가 있어 정선(양세종 분)을 잡지 못하고 멀리 떠나보냈다는 것이지만, 일단, 남자는 남자고 일은 일이니, 입봉은 다음 문제고, 공모전에 당선이 된 그 비법을 나는 너무도 알고 싶을 뿐이었다. 

사실 현수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녀는 명문대를 나와 남들 다 부러워하는 대기업을 때려치운 사람이다. 스펙 자체가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옆에는 정선과 정우(김재욱 분)가 있다. 아무리 드라마처럼 살고 싶어도 두 남자가 동시에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찾아온다면 땡큐지만, 애절한 사랑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내가 글 쓰기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리더라도 현수 언니처럼 될 수 있다는 단 한 가지의 방증이 필요했다. 





 


그 아무리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더라도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명언이 하나 있다. <쓰기의 감각>을 저술한 뉴욕의 칼럼니스트 앤 라모트는 말했다.


"글을 쓸 때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믿으라고, 무언가가 이루어질 거라고, 자기 최면을 거는 것이다."


난 믿음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아예 모를 때는 무턱대고 덤비다가 뭔가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니 오히려 겁이 나고 있었다. 내가 재능이 없다 생각, 나 같은 사람이 지천에 널려있다는 생각이 나를 점점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는 제일 먼저 나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남들이 몰라줘도, 조금 돌아가는 기분이 들더라도, 난 내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져버려서는 안 된다. 내가 나를 포기하는 순간, 정말 모든 게 끝이니까.

현수는 그런 믿음이 있었다. 입봉작의 PD와 대판 싸우고 드라마가 뜻대로 진행이 되지 않았을 때가 돼서야 자신의 재능에 대해 의심한다. 스트레스가 쌓인 현수가 실수로 물을 엎지르자 정선은 얼른 다가가 대신 닦아준다. 이런 건 내가 잘하니까 내가 하면 된다는 그의 말에 현수는 멍한 눈빛으로 말한다.  


"잘하는 게 없는 것 같아. 글 쓰는 거 제일 잘해. 근데 지금 어떻게 됐어?"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나와 월 80만 원의 돈을 받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건 자기가 무엇보다 글 쓰는 걸 제일 잘한다는 스스로의 최면이 있었다. 그게 그녀가 공모전에 당선이 된 원동력이 아닐까. 흔히들 공모전 당선 후에 입봉 하는 문제로 더 지독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당선이라는 문턱을 넘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현수는 그 문턱을 넘은 사람이었고, 입봉작은 엉망이 되었지만, 또다시 다음 작품을 준비한다. 







재능에 관한 또 다른 명언이 있다.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50가지>로 유명한 작가 나카타니 아키히로는 말했다.


"양이 곧 재능이다. 재능에 자신이 없다면 양으로 승부하자. "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지배했던 나의 연예인, 가수 이승기 씨가 <집사부일체>라는 프로그램에서 했던 말도 나의 가슴에 새겨져 있다. 


"조급한 마음보다 나 자신을 더 불안하게 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 나는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많이 써보지 않을 걸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내가 글을 쓰면 얼마나 써봤다고. 일기도 귀찮아서 매일 못 쓰면서, 벌써 포기하기엔 너무 이르다. 애초에 포기할 생각도 없지만. 

시나리오 선생님도 말했듯이 미친 듯이 쓰면, 일단 많이 써보면 뭔가 달라질 수도 있는 거다.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하다는 세 가지, 다독. 다작. 다상량. 이 중에 내가 하고 있는 건 과연 무엇일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게 아닐까? 지금보다 더 많이 쓰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다 보면, 지금 보다 더 많이 훨씬 많이, 진짜 미친 사람처럼 써 내려가다 보면 내 재능이 꽃 필 수도 있다. 

답은 나왔다. 나는 재능이 없는 것 같다는 걱정 따위를 할 시간이 없었다. 걱정이나 하면서 머리를 싸매고 있을 게 아니라 한 자라도 더 써 내려가고, 더 혹독한 피드백을 받고 그걸 바탕으로 더 견고한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면 재능은 저절로 만들어진다. 

지망생들이여, 우리의 재능이 만들어낼 작품들에 미리 박수를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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