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려도 단단하기 자라는 방법
앞선 글에서 말했듯 나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했고, 그래서 그래픽 디자인 실무는 입사 후가 처음이었다. 낯선 분야와 막막한 업무 속에서 많이 헤매고 깨졌다. 내 업을 떳떳하게 말할 수 있도록 여전히 계속 배우고 성장하고자 노력한다. 오늘은 그동안 실력을 키우기 위해 해온 방법들을 정리해 본다.
신입사원 시절 팀장님이 알려주신, 계속 기억에 남은 조언이 있다. 바로 '대충, 빠르게 많이 만들고, 그 이후에 잘 다듬어가는' 것이다. 남 보여주기 부끄러울 만큼 휘갈긴 낙서 같더라도 우선 아이디어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많이 만들어야 좋은 것들을 발견하고, 추려가면서 질을 높일 수 있다. 처음부터 시안 하나하나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낮을 질의 결과가 적게 나오게 된다. 좋은 질은 충분한 양에서 나온다.
지금까지도 가장 어려운 작업은 '심플한 디자인'이다. 적은 요소만으로 완성도를 높이는 건 많은 내공이 필요하다.경력 초반에는 어설픈 시안을 발전하려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했지만, 결국 지저분해질 뿐이었다. 그런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나려면 기본기가 필요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기본기는 중요하다. 아니 생각 이상으로 완성도의 핵심이라 볼 수 있다. 타이포그래피, 레이아웃, 조형 원칙 등의 기반이 튼튼해야 한다. 그래야 그 위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쌓거나 나만의 색을 칠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겉멋든 디자인에 불과하다. 계속 꾸준히 다져야 설득력 있는, 단단한 디자인을 완성할 수 있다.
레퍼런스를 찾을 때 흔히 같은 분야나 업계의 디자인을 참고하게 된다. 물론 효과적이지만, 차별화된 결과를 위해서는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즉, 다른 영역에서 레퍼런스를 가져와야 한다. 예를 들면 화장품 패키지 디자인을 할 때, 앨범처럼 다른 분야나 제품 디자인처럼 다른 영역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아카이브나 퍼블릭 도메인처럼, 유서 깊은 자료에서도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모은 재료들을 편집해 사용한다면 나만의 시각 언어를 만들 수 있다.
독립 디자이너나 스튜디오의 강의를 많이 수강했다. 도구 활용법이나 표현법을 배우기 위해서였지만, 그보다 크게 와닿은 것은 사고방식과 프로세스였다. 그들이 어떻게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표현하며,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 지, 그 경험을 습득하는 건 다른 차원의 유익한 배움이다. 심지어 관계자와 의사소통하는 방법, 나아가 디자인을 대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다. 그렇게 여러 프로세스를 탐색하고 따라 해 보면서 자기만의 방식을 다듬어 갈 수 있다.
디자이너마다 뾰족한 취향이 있어야 한다. 특출난 스타일, 입체 감각, 독보적인 색감 등 어떤 것이든 좋다. 그 고유함의 깊이를 더하다 보면, 이를 중심으로 다른 역량이 덩달아 따라온다. 물웅덩이가 직각이 아닌 곡선으로 깊어지는 것처럼 서서히 넓어진다. 취향이 생기면 거기에 갇히는 게 아니다. 취향의 벽을 세워야, 비로소 그걸 허물고 새로운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 하나의 중심에서 확장되는 역량은 디자이너로서 경쟁력을 더욱 넓혀준다.
디자인 실력은 한 번에 늘어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나아지는 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꾸준히 시도하고, 실수하고, 다듬어 가는 과정을 이어 가보자. 계속 배우고, 더 나아지기 위해 여러 방법을 모색해 보자. 그렇다면 어느샌가 훌쩍 성장한 나를 발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