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곳에 호랑이가 살았다고??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 조선시대 호랑이로 매우 유명했던 산이 있다. 산이 많은 한반도는 오래전부터 호랑이 천국이었는데, 유독 인왕산 일대에 호랑이가 자주 사대문 안으로 출몰했다고 한다. 실제 경복궁과 창덕궁 후원까지 들어온 적도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번 언급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개체 수가 급감하였고, 1868년 북악산 등에서 잡은 다섯 마리를 마지막으로 도성 내 호랑이는 모두 사라졌다.
호랑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왕산 초입에는 여전히 금빛 호랑이 한 마리가 살아서 경복궁을 지키고 있다. 인왕산은 한양을 감싸던 성곽 한 축을 담당했던 산줄기로 뼈대 자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새는 호랑이가 웅크린 형상과 닮아있다.
서울 도심엔 산이 많다. 그래서 교가에도 꼭 산이 등장한다.(내가 다녔던 초중고도 다 산이름이 있었다!) 인왕산이 들어가는 교가를 찾아보니, 강남으로 이사 간 서울고등학교가 인왕산 정기를 받았다.
"인왕의 억센 바위 정기를 타고~"
그래서일까, 한국엔 유독 산을 타는 사람이 많다. 나 또한 광화문에 살고 나서 종종 인왕산에 오른다. 정상까지 비교적 오르기 쉬우면서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사계절을 품는다. 여름엔 푸른 녹음이 바위와 어우러지고, 겨울엔 바위 위로 쌓인 눈이 절경을 이룬다.
<인왕제색도>로 유명한 겸제 정선 또한 이곳에서 태어나 인왕산을 소재로 그림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 수성동 계곡을 복원할 때 정선의 그림을 참고했을 만큼 사실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실로 동네 산을 유심히 살피고 그린 것이리라.
인왕산(仁王山)의 매력
인왕산 정상은 338.2미터로, 왕복 1-2시간 정도면 등산이 가능하다. 서울 도심에서 접근성도 좋고 등산길도 잘 정비되어 있어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다.
인왕산은 서울 도심 야경을 보기 위해 평일 저녁에 찾는 사람들도 많다. 나 또한 최근 퇴근 후 인왕산에 올랐다. 더운 날씨임에도 꽤나 많은 사람들을 보았고, 청바지 등 평상복으로 오르는 사람도 있었다.
경복궁역에서 출발하여 금빛 인왕산 호랑이 동상을 만나게 되면, 산 입구에 이르렀다는 표시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등산길 입구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인왕산 자락길을 도는 산책 코스가 된다. 종주 코스로는 정상을 지나 홍제동 채석장이나 부암동 하림각, 자하문 방면으로 하산할 수도 있다. 동서남북 여러 방향에서 인왕산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등산로도 많지만, 보통 많이 가는 코스는 아래와 같다.
경복궁역~황학정국궁전시관~범바위~정상~수성동계곡/부암동~청와대앞길~서촌~경복궁역
인왕산은 성곽을 따라 걷는 구간이 꽤 길다. 특히 정상을 지나 청운동으로 내려가는 길의 성곽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성벽 원형을 만날 수도 있다.
정상에서는 탁 트인 서울 도심 뷰를 즐길 수 있다. 낮에 오른다면 드넓은 하늘과 성곽,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서울 도시 풍경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고, 주변 나무들을 통해 계절감을 느낄 수 있다. 밤에 오른다면 달빛과 어우러지며 반짝이는 서울 야경에 절로 감탄이 나올 것이다. 성곽길에도 조명이 들어오기 때문에 인왕산은 밤에도 아름답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잼버리에서도 서울 야경챌린지 프로그램으로 남산·북악산·인왕산 일대 트래킹을 통해 서울의 야경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인왕산 중턱에 자리 잡은 초소책방은 책방을 겸한 북카페로, 2020년 11월 처음 문을 열었다. 초소책방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원래 청와대 방호 목적으로 경찰 초소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다. 북한군이 청와대 기습을 시도했던 1.21 사태 이후(남파공작원이었던 김신조는 인왕산을 넘어 도주하던 중 세검정에서 투항하였다.) 인왕산과 북악산에는 시민들의 출입이 통제되었는데, 2018년 다시 전면 개방되면서 대부분의 초소 및 경계시설이 철거되었다.
초소책방은 안과 밖을 가르는 벽이 유리로 되어있으며, 옥상과 정원 테라스까지 모든 공간이 열려있다. 협소하지만 주차장도 있어 자동차로 접근이 가능하다. 하지만 날 좋은 날 둘레길을 걷다가 여유를 즐기며 쉬어가보자.
등산 후 먹는 밥은 맛있을 수밖에 없겠지만, 인왕산 초입과 하산길에 있는 서촌에는 유난히 먹거리와 맛집이 많다. 특히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나오면 바로 보이는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에는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서촌계단집, 체부동잔치집, 안주마을 등 걸출한 맛집들 중에서도 등산 후 갈만한 곳을 엄선해 보았다.
안주마을
제철에 맞는 싱싱한 해산물들을 안주 삼아 막걸리와 한 잔 하기 좋다. 특히 남해 총알 한치회와 단새우회가 맛있고, 청어알 비빔밥은 갈 때마다 꼭 시키는 메뉴다. 포차 느낌의 장소로 의자나 테이블이 편하지 않아도 밤늦게까지 항상 사람들로 가득 찬다. 평일에도 항상 대기가 있는 서촌의 대표 맛집이기 때문에, 테이블링 등 앱을 통해서 등산 전 미리 줄 서는 것을 추천한다.
김진목삼
서촌에서 제일 좋아하는 고깃집이다. 2018년 오픈했을 때부터 꾸준히 가는 곳으로, 김진 사장님이 하는 목살, 삼겹살 집이다. 아버지는 정육점을, 어머니는 반찬을 직접 만드신다고 한다. 종류는 세 가지 목살, 삼겹살, 항정살이고, 고기는 직접 구워주시는데 육즙이 살아있어 살살 녹는다. 고기와 된장찌개를 같이 먹은 후, 후식냉면으로 마무리해 주면 딱 좋다.
이가면옥
등산 후 시원한 냉면이 빠질 수 없다. 주말에 인왕산을 등산한 후에는 이가면옥을 가곤 한다. 따뜻한 육수가 함께 기본으로 서빙되는데, 나는 이 육수가 제일 맛있다. 깔끔하면서 진한 맛에 음식이 나오기 전에도 홀짝홀짝 몇 컵씩 마시곤 한다. 찐만두도 있지만 군왕만두도 유명하다. 시원한 냉면과 따끈한 만두를 먹고 나면 그제야 등산을 완료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예로부터 명당은 풍수지리적으로 ‘좌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를 고려했다. 나라의 중심이었던 경복궁은 낙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 자리로 삼았다. 인왕산은 필연적으로 호랑이와 깊은 인연을 맺은 셈이다.
그러한 인왕산에 2023년 4월 산불이 났다. 축구장 21여 개 면적의 임야가 소실되었다. 20년 만에 서울에서 난 산불로는 최대라고 하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산림이 자라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산불로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가을이 되면 금빛으로 물들 인왕산을 기약하며,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왕산 호랑이의 등을 올라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