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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효 Feb 11. 2023

30년간 가장 사랑받은 광화문 글판의 비밀

계절 하나, 시 하나. 광화문이 계절을 맞이하는 법

볕의 온도가 올랐다. 아침공기는 여전히 차갑지만, 코 끝에 시리는 공기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겨울이 되면 광화문 빌딩들 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를 보며, 빌딩들도 추워서 입김을 내뱉는 것은 아닐까 상상을 하곤 했다. 2월 4일 입춘을 지났으니, 입김을 멈추고 건물 밖으로 나올 때다.


광화문에서 내가 계절을 체감하는 바로미터는 교보생명 빌딩에 걸려있는 광화문 글판이다. 계절이 바뀌면 광화문 글판도 새 옷을 입는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인생 한 문장'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광화문광장으로 향한다.


1. 광화문 글판은 언제마다 바뀔까?


일명 교보문고 현판은 1991년 시작되었다. 신용호 교보생명 창업주가 직접 목 좋은 광화문사거리에 좋은 글귀를 소개하자는 취지였다. 처음엔 '우리 모두 함께 뭉쳐 경제활력 다시 찾자'는 글귀로 계몽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2001년부터 계절마다 옷을 입으며 글판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가로 20m, 세로 8m에 달하는 광화문 글판은 공식적으로 3, 6, 9, 12월에 새로운 글이 걸린다. 1, 4, 7, 10월에 문안을 선정하고, 2, 5, 8, 11월에 디자인 작업을 한다.

'광화문 글판'이라는 공식적인 이름이 있지만, 글판은 광화문과 강남 교보타워를 비롯해, 부산, 광주, 대전, 천안, 제주도 등 전국 7개 사옥에서도 볼 수 있다.


2. 광화문 글판은 어떻게 선정되는 것일까?

춤만큼은 마음 가는 대로, 허락은 필요 없어
광화문 글판 100호. BTS 'Permission to Dance'


광화문 글판의 100번째 옷은 BTS의 'Permission to dance'였다. 보통 글판의 문구는 시인·소설가·카피라이터·언론인 등으로 구성된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와 시민 참여를 통해 선정된다. 시, 가사, 명언 등에서 선정되기도 하고, 시민 공모를 하기도 하는데 600~2000편 정도 접수된다고 한다. 평가기준은 첫째가 진정성, 두 번째가 심미성, 세 번째가 가독성이다.


3. 역대 가장 사랑받은 글판은 무엇일까?

30년간 100벌의 옷

광화문 글판 30년 인생 중 가장 사랑받은 옷은 나태주 시인의 <풀꽃>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고 한다.

재밌는 것은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1차에서 탈락되기도 했지만,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시의 구절처럼 다시 채택되어 가장 오래 사랑받는 문구가 되었다.

2012년 봄 광화문 글판, 나태주 <풀꽃>
2011년 여름 글판 정현종 <방문객>


4. 지금, 현재 광화문 글판은?


2023년 2월 현재, 이번 겨울엔 진은영 시인의 <어울린다>가 걸렸다. 코로나로 인해 느슨해진 관계들 속에서, 너와 나는 존재함으로 연결된다.

'어울린다'는 말은 두 종류 이상의 존재가 만났을 때 표현할 수 있고, 동시에 자유도가 높다고 생각했어요. 어울리고 싶지 않다면 떠날 수 있고, 어울리고 싶다면 나를 바꿀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서로가 꼭 똑같아져야 한다는 의미는 또 아니고요. '함께 있어도 보기 좋고, 차이가 나도 괜찮다'는 의미를 가진 가장 아름다운 말이 바로 '어울린다'는 단어라고 생각해서 시로 표현해 봤어요.  

-진은영 시인 인터뷰 중-


나는 광화문 글판에 실린 시의 전문을 찾아보곤 하는데, <어울린다>에서 구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너에게는 2월이 잘 어울린다/하루나 이틀쯤 모자라는 슬픔이' - 슬프고 힘든 마음이 들 땐 2월을 난다고 생각하면, 하루 혹은 이틀, 아주 조금은 더 빨리 봄이 찾아오지 않을까.


2022-2023 겨울 광화문 글판, 진은영 <어울린다>


5. 광화문 글판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은 모두에게 다르게 온다. 나무는 겨울에 굵은 가지만 남겼다가, 가지 사이로 새순을 돋아낸다. 새로 난 잔가지들은 봄이 되면 기지개를 켜듯 하늘 위로 높게 뻗을 것이다.

광화문 글판에서 찾은 나의 계절들은 때로는 몽글몽글하게, 때로는 먹먹한 그리움으로, 때로는 속이 꽉 차게, 때로는 갑북갑북 따뜻하게 왔다.





광화문을 읽다, 거닐다, 느끼다.


광화문 글판은 계절을 쌓아 책이 되기도 했다.

열 번째 글로 '광화문 글판'을 쓰게 된 건 사적인 이유다. 작년 말부터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운이 좋아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광화문을 읽고, 거닐고, 느끼며(먹고, 자고, 공부하고, 일하며) 10년 동안 무엇이든 항상 열심히 했던 시간이었다. 글도 꾸준히 쓰다 보면 다소 삐죽한 지금의 글들이 언젠가 유연하게 구부러져 마음에 닿지 않을까? 광화문 글판이 세월을 지나며 말랑말랑해졌듯이.


당신의 계절은 무엇으로 닿을까. 마음에 와닿았던 광화문 글판 몇 개를 조금 더해본다. (교보생명 홈페이지에서도 광화문 글판 전체를 볼 수 있다.)



H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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