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없는 곳만 골라 다닌 교토 근교 여행기
"효효야, 우리 이번에 좀 새로운 곳으로 가보는 게 어때?"
언니와 함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야마자키 위스키 투어'를 신청했지만, Lottery 당첨이 되지 않았기에 새로 일정을 짜야했다. 금각사, 은각사, 청수사 등 관광지로 유명한 곳들은 가본 경험이 있기에, 블로그나 유튜브 대신 구글맵을 찬찬히 훑었다. 교토 근교의 산과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이번 여행은 교토 근교에 있는 장소들을 가게 되었고, 공항을 제외하고는 한국 여행객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막 단풍이 지기 시작하던 교토는 화려하진 않아도 고즈넉한 가을이 있었고, 생각보다 따뜻한 날씨에 걷기에도 좋았다. (일본의 가을 단풍은 한국보다 조금 늦어서 11월 말쯤이 절정이라고 한다.)
젠 스타일 정원 속에서 느끼는 교토의 자연
세 개의 정원으로 이루어진 오색정원
일 년에 세 번, 특정기간에만 오픈되는 '루리코인'은 히에이산 기슭에 위치해 계절마다 바뀌는 경관으로 유명하다. 교토 시내에서 북쪽으로 30분 정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곳으로, 올해 추계 특별 오픈기간(10/1~12/11)과 일정이 맞아 예약 신청을 했다. (홈페이지에서 시간대 별로 예약을 받고 있으며, 2000엔의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
입장 시간에 맞추어 대기하다가 단풍 한줄기가 드리워진 정문을 통해 들어간 루리코인은 세 개의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돌계단을 통해 사찰로 올라가는 길도 좋았지만, 신발을 벗고 실내로 들어가 2층에서 마주한 첫 번째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다. 이곳은 풍경 Reflection으로도 유명한데, 자색빛(瑠璃色)으로 빛나는 모습에서 '루이코인(瑠璃光院)'이라는 절의 이름이 붙여진 만큼 오묘한 자연색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동양의 모네 <수련>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1층에 위치한 '루리정원'과 '와류정원'은 바위 사이로 물이 흐르고 있었고 카펫처럼 이끼가 가득 덮인 정원으로 초록초록한 느낌이 강했다. 툇마루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공간에 머물렀다. 현재는 사찰이지만 본디 메이지시대에 세워진 별장이었던 루리코인은 한 때 '평안'의 상징으로 사랑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오계절(봄, 여름, 우기, 가을, 겨울) 숨 쉬는 이끼정원
이끼정원으로 불리는 '사이호지(Saihoji)'는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으로, 일본에 남아 있는 정원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고케데라(이끼숲)'라는 별명답게 120여 종의 이끼가 정원을 가득 덮고 있다. 교토 서쪽에 위치한 사이호지는 비교적 습한 지역으로 풍부한 자연에 둘러싸여, 이끼가 자연적으로 자랄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고 한다.
사이호지 방문이 특별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루에 관광할 수 있는 인원수가 정해져 있어 미리 예약을 해야 하고, 입장 후 법당에서 붓글씨로 쓰며 자기 수양을 마친 후에 정원을 돌아볼 수 있다. 예약시스템도 다소 독특한데, 직접 종이 우편을 보내 예약을 신청하고 회신을 받아야 예약 확정이 된다. (현재는 남은 자리에 대해서는 온라인 예약이 가능하다. 다만, 4000엔의 입장료를 미리 지불해야 한다.)
실제로 법당에 들어서자 경전 글귀가 써져 있는 종이와 붓펜을 나누어 주었다. 한 글자 한 글자 필사에 집중하며 마지막에는 내 이름 석자를 적었다. 그리고 정원에 들어서는데 온통 이끼로 덮인 흙과 돌, 나무들이 너무 신비로웠다. 솜털 같은 이끼를 직접 만져보기도 하고 눈으로 담아내면서 커다란 연못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사이호지는 대표적인 치센카이유식 정원(중앙에 있는 연못 주위를 돌며 관상하는 정원)으로, 물에 비치는 정원의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 햇볕에 비치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이곳에서도 한참을 머물렀다.
결국 남는 것은 음식, 그리고 사람
교토의 한 선술집에는 수십 년째 한신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타코야끼를 굽는 아저씨가 있다. 부부가 운영하는 이 타코야키 집은 동네 단골들이 모이는 집으로, 그리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지만 한결같은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한다.
좌석은 모두 카운터 바로 되어있는데, 만석이어도 손님이 오면 어디선가 계속해서 의자가 생기고 주변 손님들이 자리를 조금씩 내어준다. 우리가 방문한 날도 그랬다. 다만, 그날이 조금 더 특별했던 것은 한신타이거즈가 38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가게에 TV는 없었지만 라디오를 통해 다들 야구 경기에 집중했고, 우승의 순간 모두가 한신타이거즈 응원가를 부르며 하나가 되었다. 쉴 새 없이 아카시야키(*타코야키를 국물에 찍어먹는 음식)를 굽던 주인아저씨도 씨익 웃으며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좀처럼 손님(아마도 외국인)에게 말을 거는 법이 없던 아저씨가 우리에게 본인을 가리키며 '배철수!'라고 내뱉었다. 어라? 그런데 진짜 아저씨가 배철수를 닮았다. 진짜 닮았다며 연신 신기해하자 옆자리에 있던 현지분들도 관심을 가졌다. 한신타이거즈 우승에서 갑자기 배철수로 하나 되는 순간, 잔술은 넘치게 담겼고 주인아저씨와 함께 인증샷도 남겼다.
도착하던 날, 일본의 젊은 친구들이 하는 소바집을 찾았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가게로 오후 9시쯤 가자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무엇을 주문할까 하다가 메뉴 세 개를 추천해 달라고 했는데 번역의 문제였을까, 3~4개의 메뉴 외에도 소바까지 쉼없이 나왔다. 음식 중에는 마로 만든 모밀이 특이했는데 이미 잡지에도 소개된 바 있다고 했다.
오랜 시간 머물며 서로 웃고 떠들다 친해져서, 마지막에는 SNS 친구가 되었다. 나중에 올라온 게시물에 우리 사진과 일본어가 적혀있어 번역해 보니, '씹는 것은 헛수고다'라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우리가 많이 먹긴 했지) 순간 당황했지만, 일본어 하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캄사-하므-니다'라는 식으로 적으면 그렇게 번역될 수 있겠다고 했다. 괜히 오해할 뻔했다.
사이호지에서 시내로 돌아오기 위해 택시를 타던 순간 우리는 직감했다. 출발하기까지 족히 10분은 걸릴 것이라고. 연세가 지긋해 보이시는 운전기사님은 가지런히 정돈한 머리가 인상적이었는데, 가고자 하는 장소를 듣더니 내비게이션이 아닌 종이 지도책을 펴셨다. (종이지도책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주소를 찾아 최종 목적지를 확인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는데, 여기서 반전은 기사님이 그렇게 확인을 해주신 덕분에 가고자 했던 밥집이 오늘 휴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기사님이 종이지도책을 찾지 않고, 섬세하게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문 닫힌 가게 앞에 도착해서 당황했을 것이다. 네비 없이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셔서 잠깐이지만 차에서 꿀잠까지 잤다. 때로는 아날로그가 좋은 법이다.
momo에 가면 다양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모모 사장님의 음악적 취향은 실로 넓고 깊어서, 술을 만들면서도 끊임없이 LP를 꺼내 들어 선곡을 하셨다.(희귀한 LP들도 많았다.) 평소 좋아하던 Nujabes의 'Luv 3'를 신청했다.
화장실에 붙은 메모 또한 인상적이었다. 이곳은 조용한 바가 아니니 언제든 얘기하고 노래하고, 춤추라! 마감시간에 가까워질 무렵부터는 모두가 하나 되었고, 사장님의 흥이 바로 momo 그 자체였다.
그 나라에 남겨두고 오는 것
나에겐 여행을 할 때마다 그 나라에 하나씩 내 물건을 남기고 오는 징크스가 있다.(방문 기부라고 해두겠다..) 작년에는 코로나 이후 오랜만에 면세점에서 샀던 선글라스를 퀘벡에서 몬트리올로 향하는 휴게소에서 단풍잎 대신 두고 왔고, 올해 뉴욕에 갔을 때는 동생한테 주려고 샀던 면세품을 공항 의자에 두고 나왔다. 그런데 아뿔싸, 이번 여행지에도 어김없이 기부를 할 뻔했다. (다행히 카레집 점원 분이 잊지 않고 선글라스를 챙겨주었다.)
무언가 놓고 오지 않을 때는 마음을 두고 오는 편이다. 바르셀로나에는 사그리아 파밀리아 성당이 완공되면 다시 오겠다는 마음을 방명록에 적어 두었고, 올해의 뉴욕에는 다시 갈 마음을 곳곳에 두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무언가를 두고 오지 않았지만 음식과 사람, 교토의 가을이 꽤나 마음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