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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hyun Hwang Jan 07. 2019

엄마 아빠 사랑해요!

'엄마 아빠 사랑해요!'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빚진 기분이 듭니다. 그 말을 해주는 아이들한테가 아니라 부모님한테 말입니다. 아직 쓸만한 제 기억에 의하면 저는 이나이 되도록 부모님께 저 말을 한번도 해드린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고인이 되셨으니 마음을 다잡고 아버지 사랑합니다 라고 하고 싶어도 아무 소용없는 노릇입니다. 일년에 한번 뵙는 어머니는 기껏 뼈와 가죽만 남은 손을 한번 만져보는 것으로 제 마음을 대신합니다.


왜 이렇게 사랑한다는 말이 어려운 것일까요?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는 교육을 받고 자라 그런 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정을 가벼이 드러내는 것은 교양없는 행동이라는 주변 분위기 탓이었을 것이라고 변명을 해 봅니다. 동기가 무엇이든 결론은 제가 그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 가벼이 여기는 듯한 세태에 조금 불편한 마음도 없지 않습니다.


아직 집에서 기운이 제일 센 저는 그 덕분에 집에서 제일 큰 텔레비젼의 리모콘 지배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전 같으면 이것이 제법 폼 나는 권세일텐데, 테레비가 이미 여러 옵션 중 하나가 되어 버린 오늘날 이 리모콘 지배권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같은 신세나 다름 없습니다. 제가 집에서 보는 것은 폿볼, 골프 중계 이거나 뉴스, 다큐 프로그램입니다. 드라마나 영화, 리엘리티 쇼는 잘 보지 않습니다. 자연히 거실 TV 시청은 저의 독무대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여론 관리를 위해 리모콘 지배권을 내려 놓아야할 때가 있습니다. 집단 항명이 있으면 아무리 힘이 세도 물러서는 것이 상책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저는 '민주주의 아버지'를 자처하는 사람이라 여론의 향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큰 화면으로 봐야 재미가 더하는 행사 중계라든지, 단체로 영화를 보겠다고 하는 때가 그럴 때 입니다. 어제밤 NBC에서 중계한 골든 글로브 시상식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한국계 캐나다인으로 미국 방송계에서 맹활약중인 산드라 오가 이 행사 진행자로 결정되었다는 안내가 이미 두어달 전부터 시작되었고, 저를 제외한 온 식구들은 그때부터 이 중계방송을 반드시 봐야한다고 다들 난리들이었습니다. 연예인들끼리 모여 자기들 잔치하는 걸 봐서 뭐하나 싶었지만 이 들끓는 여론을 제가 외면했다가는 몇달이 불편할 것 같아서 약간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뭐 그정도야 내가 양보하지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제 걱정은 오직 하나, 풋볼 중계와 이 시상식 중계가 겹치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이었죠. 다행히 풋볼 중계가 끝나자 마자 골든 글로브 중계가 시작되었습니다.


빨간색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산드라 오'는 아무리 넉넉하게 평가를 해도 미인은 아닙니다. 아마 한국에서 연예인 생활을 했으면 정말 잘해야 조연급으로 만족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미국 방송계에서는 당당한 주연급 배우입니다. 중계가 시작되고 오프닝 멘트를 이어갈 때 다소 긴장한 모습이 보였지만 역시 관록의 배우답게 무대를 잘 소화하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습니다. 중간 중간 보는 둥 마는 둥 하는데 갑자기 텔레비젼에서 우리말이 툭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 사랑해!"


놀랍게도 산드라가 TV 드라마 부분 여우 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아 놀랍게도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산드라는 2005년 이미 여우 조연상을 받은 바 있습니다. 주연상까지 받으면서 미국 연예계에서 이제 자타가 모두 인정해 주는 진정한 별이 된 것입니다. 이 상을 받고 수상 소감을 밝히면서 관객석에 앉아 있던 어머니 아버지를 향해 너무나 또렷한 우리말로 '엄마 아빠 사랑해!' 라고 한 것입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걸 감추느라 더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올 가을 고향집을 방문할 때는 엄마 손을 잡고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과연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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