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미술 칼럼

내 얼굴을 찾아 나선 길

-제니 홀저;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

by 양양

나는 자주 걷는 편이다. 날더러 유난히 걷기를 즐긴다거나 남들보다 특별히 많이 걷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그렇다고 장담하여 말할 수는 없으나, 내게는 그 흔한 운전면허증은 없고 요즘 사람들에게서 좀체 보기 힘든 차멀미는 있으니 걷기는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걷기는 육체노동보다 신경 노동을 많이 하는 나에게 일종의 휴식의 행보이며 늘 모자란 운동량을 채우기 위한 나름 구실 좋은 핑계이자 빠르게 변하는 대도시의 풍경과 유행을 구경하며 소극적이나마 동시대의 풍조에 참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명 상점이 밀집되어 있고 유동인구가 많은 대로를 따라서는 오래 걷지 못한다. 높고 크고 붐비며 위엄 있는 것들은 위압적이다. 넘쳐나는 시각정보들과 가공된 냄새, 과열된 소음들이 마구잡이로 덮쳐올 때면 나는 흡사 기수를 잃어버린 경주마가 콧김을 내뿜으며 날 향해 돌진해오는 것 같은 위협을 느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서둘러 좁은 길을 찾는다. 조선시대 육의전 거리에서 지체 높으신 이의 행차나 말이 지날 때 그것을 피해 피맛길로 숨어든 행인처럼 나는 좁고 후미진 골목길을 찾기에 필사적이다.


인적이 드문 좁고 외진 길만을 찾고 대로를 멀리하는 일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개성이나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궁색한 변명을 하자면 나는 내 마음의 고즈넉한 평화를 위하여 일종의 예배의 장소들을 찾아다니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소로가 산책(sanutering)이라는 말의 어원을 근거로 말하길, "걷는 기술은 상징적으로 성스러운 땅에 도달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길의 자력에 발을 맡기는 것이라" 하지 않았나! 그러나 나는 솔직해져야만 한다. 내가 도달하고자 한 예배의 장소란 게 소로가 말한 성스러운 땅과 동일하다 할 수 있는가?


나의 좁은 길 걷기는 너무나 크고 막강한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으로 비롯됐다.


Jenny Holzer, Project me from what i want, 1984.jpg Jenny Holzer, Project me from what i want, 1984


내게는 없는 모든 빛나는 것들, 그리하여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들로 인한 상실감과 밝은 전망의 부재가 나로 하여금 인적이 드문 길로 숨어들게 했다. 그렇게 잔뜩 움츠려 든 나의 자아는 스스로를 인정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제 존재양식을 위협하는 타자를 밖으로 밀어내는데 열중했다. 그러나 이렇게 키워낸 '타자 혐오'가 실상은 무기력하고 신경질적인 '자기혐오'라는 역설에 부딪힌다. 이상적인 나를 위협하는 타자는 '내 밖의 타자'가 아니라 바로 '내 안의 열등한 자아'였던 것이다.


실상은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단절될까 봐 두렵고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귀속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나는 날 닮은 좁은 길에서만 안식했다. 그러고 보니 좁은 길은 내 맘의 기막힌 무질서와 상처받은 자아의 완벽한 상징이다! 그러나 내게 친숙한 것에만 침잠해서는 결코 불안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해방은 고통의 망각과 진실의 외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해방을 위해서라도 칼 슈미스(Carl Schmitt)의 강령을 따라야만 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척도를, 나 자신의 경계를, 나 자신의 형태를 획득하기 위해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적이란 '오직 내가 원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라는 제니 홀저(Jenny Holzer 미국의 개념미술가)의 전광판 메시지가 귓가에 경종으로 울린다.


나의 완벽한 실현을 막는 것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니! 이 수치는 나로 하여금 아픈 자기 대면의 길을 걷게 한다. 기대와 욕심에 차지 않아 멀어진 나 자신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름 없는 것 속에서 실존하는 법부터 배워야"(하이데거) 할 것이다. 오랫동안 왜곡해온 또 외면해온 '나 자신과의 화목'을 도모하고 더불어 세상과 교제하는 일... 뜻대로 –담대하게- 될까? 자신 없다. 하지만 세상이 내 몫으로 펼쳐놓은 모든 길을 내 편의대로 고르지 않고 남김없이 걸어보기로 한다. 느리지만 확고한 발걸음으로.


그리하여 마침내 진정한 내 얼굴을 찾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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