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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양 Feb 06. 2020

기다림

-에드워드 호퍼; 기다림의 의미-

 나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막연하게 뭔가를 계속 기다리게 되는 날이 있다. 그것은 받고 싶은 전화일 수도 있고, 보고 싶은 사람일 수도 있고, 듣고 싶은 목소리일 수도 있고, 그냥 어떠한 우연을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흥분이 사라진 나날들. 어쩌면 마음의 허한 한 구석을 기다림이라는 흥분으로 대신 채우려는 심리일지도 모르겠다. 기다릴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니까. 그것은 정녕 마음이 가난해지는 일이다. 

 그렇다고 기다림이 곧 희망일까? 

 그러나 뭔가를 기다리다 보면 어느 날 불쑥, 마치 신의 은총처럼 "자기 자신에게 형태와 존재를 부여할 준비가 되었다는 느낌 앞에 서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모든 의미에서 견뎌내는 자임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1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여인들처럼. 삶의 지루함과 외로움과 서글픔을 담배 개비와 커피 한잔으로 이겨내고자 하는 그녀들의 담담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혼란스러울 정도로 닮았으니 말이다. 그녀들은 그 시각 무엇을 기다리는가? 무엇을 견뎌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곧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거니와.  



11 A.M

나는 선택하지 않는 것을 완강하게 선택한다네(볼프강 폰 괴테,『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중에서).
에드워드 호퍼, <오전 11시>, 1926

 오전 11시. 한 젊은 여인이 두 손을 맞잡고서 짙은 코발트블루색의 안락의자에 앉아 가만히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여인은 검은색 플랫 구두만 신은 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여인의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는 그늘에 묻힌 붉은 램프와 녹색 카펫, 브라운 서랍장과 회색 커튼과 대조되며 우리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 끈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갈색 머리는 코 끝만 살 짝 남긴 채 얼굴 전반을 가리고 있어 우리는 그녀의 표정을 가늠할 수 없다.

 안락의자는 관람자 쪽을 향하여 놓인 반면, 여인은 우리로부터 몸을 홱 돌려 창가로 향해 있다. 이러한 '열림과 닫힘'의 구도, '초대와 거부'의 몸짓은 호퍼 특유의 회화 문법이다. 이러한 장치는 우리로 하여금 화자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하다가도 돌연 몇 걸음 물러나게 만든다. 

 도대체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알몸에 달랑 구두만 신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분명 나갈 차비를 취한 듯한데 왜 우두커니 창 밖만 내다보고 있는 걸까? 뭔가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다기보다는 어떤 생각에 잠겨있는 듯하다. 혹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결론이 나길 기다리는 걸까?



늦은 오후, 휴게실에서

에드워드 호퍼, <휴게실>, 1927 
 일요일 점심 시간 무렵 혼자 찻집에 앉아 있다. 유리창 너머 벽에 붙은 포스터에는 콜뢰슈가 얼굴을 찌푸리며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나는 추위를 느낀다(롤랑 바르트,『사랑의 단상』중에서).


 통유리창으로 된 벽면 앞에 푸른색 원탁 테이블이 놓여 있다. 녹색 코트에 노란 모자를 쓴 여인이 거기 혼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곱게 화장을 하고 잘 차려입은 여인의 모습을 보아하니 이제 막 퇴근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신경 쓰고 나온 것 같기도 하다. 

 커피잔을 든 손은 장갑을 벗었으나 다른 한 손은 여전히 장갑을 낀 채 있다. 추운 바깥에서 휴게실로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전히 손이 시려서 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이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어서 일 수도 있겠다. 

 휴게실은 한산해 보인다. 그림이 다른 테이블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 그림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적막감이 돈다. 

 여인은 커피잔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다. 우리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녀의 등 뒤로 통유리창에 반사된 두 줄의 천장 조명이 점점이 멀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은 점차 희미해진다. 마치 여인의 깊은 고민 속으로 아득히 빠져드는 것만 같다. 



에드워드 호퍼, <호텔 유리창>, 1955

한 밤 중, 호텔 로비에서

때로 섬광 같은 순간에 나는 잠에서 깨어나 내 추락을 뒤엎는다. 내 조그만 일상 생활과 거리가 먼 외국의 한 낯선 호텔방에서 불안에 떨며 기다리노라면, 갑작스레 하나의 힘찬 문장이 내 마음속에 떠오른다. ‘도대체 내가 여기서 무얼 하는 걸까?’(롤랑 바르트,『사랑의 단상』중에서). 


백발의 여인이 붉은 모자와 붉은 드레스를 입고 하얀 망토까지 걸친 완벽한 모습으로 호텔 로비 소파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다. 

 길 밖 창문 가까이에 있는 큰 기둥이 왼편 너머로부터 노란빛을 받고 있다. 지나가는 차의 헤드라이트 때문일까? 누군가가 이 여인을 데리러 오기로 했을까? 그래서 저리도 하염없이 창 밖을 응시하고 있는 걸까? 첫차를 타기 위해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앉아서 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차림이 어디를 가기 위함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어디로부터 이제 막 당도한 것이라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 그녀는 지금 호텔 로비에 앉아 있으니 말이다. 

 그녀의 기다림은 무엇에 발이 묶여 있는 듯도 하고, 정반대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날 채비를 하는 것도 같다. 무엇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오직 사다리꼴의 호텔 창과 공간의 짜임만이 확실성을 줄 뿐이다. 호퍼의 그림이 언제나 그렇듯, 공간의 형태만 사실적일 뿐 그 공간에 놓인 인물들의 상태에 대해선 늘 침묵할 뿐이다.



모든 기다림의 시간

저는 주제넘는 바보입니다만, 저를 지탱해 주는 제 안의 희미한 것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습니다(플래너리 오코너,『기도 일기』중에서)


에드워드 호퍼, <오전의 태양>, 1952

 호퍼의 그림은  “짧고 고립된 순간의 표현이다.”2 우리의 삶을 특징 지우는 중간적인 순간들을 마치 티브이의 정지화면처럼 보여준다. 우리의 눈에 콕하고 박히는 장면들은 너무나 사실적이라 마치 우리의 일상을 화가가 훔쳐보기라도 한 듯 당황스럽다. 그 친밀성은 우리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끌고 우리로 하여금 잠시 다른 것들로부터 눈을 떼 그림 속으로 온 마음을 집중시키게 만든다. 그러다 돌연 너무 가까이는 오지 말라며 몇 걸음 물러서라고 한다. 그렇게 그림은 자신을 그냥 지나쳐 가라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아침 햇살이 방안에 스미는 데 좀체 하루를 시작할 엄두를 못 내는 여자, 만날 사람도 없는데 홀로 카페에 앉아 식어가는 커피잔을 손으로 매만지고 있는 여자, 여행 갈 짐을 꾸렸건만 막상 떠나지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머무르지도 못하겠고, 하여 하염없이 창밖만 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여자....... 모두 우리의 모습이 아니던가! 

 우리도 호퍼의 여자들처럼 'go', 'stop'이란 두 개의 상반된 명령어 앞에서 얼마나 주춤거리며 사는가? 그것이 도통 해결이 안 나기에 어느 시간엔 골똘히 고민하고 또 어느 시간엔 그저 무심히 시간을 넘기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기다림의 시간만 무성해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주춤거리는 시간이 우리의 존재를 일깨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뭔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일 테니 말이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계속 기다릴 것이다. 기다림의 끝은 삶의 끝일 테니.  




1) 피에르 쌍소, 김주경 옮김,『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 동문선, 2000, 110쪽.

2) 마크 스트랜드, 박상미 옮김, 『시인이 말하는 호퍼: 빈방의 빛』, 한길아트, 2007, 113쪽.


[참고문헌]

마크 스트랜드, 박상미 옮김, 『시인이 말하는 호퍼: 빈방의 빛』, 한길아트, 2007.

피에르 쌍소, 김주경 옮김,『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 동문선,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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