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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양 Jul 20. 2020

괄호

-외면 일기-

 흐리고 음침한 날이다.

 간 밤에 잠을 거의 못 잤는데 그것이 사납게 분 비바람 탓인지 아니면 불면증이 다시 시작된 것인지 분명치 않다.  

 하루를 늦게 시작하더라도 하루의 일과는 변함이 없다. 설거지하고, 청소기 밀고, 빨래 널고, 화초에 물 주고, 화분에 기어 다니는 벌레 잡고... 착착착.   

 벌써 여섯 시가 돼가니 슬슬 저녁밥상을 차려야겠는데, 비도 오고 하니 감자랑 애호박 넣고 뜨끈하게 된장찌개를 끓일까 하다가 그만둔다. 엊그제 먹다 푸실리가 냉장고에 그대로 있고 하나 남은 오이가 물컹해지려고 하니 이걸 썰어다 넣고 파스타나 해 먹어야겠다. 당장에 입 당기는 것보다 상하기 전에 빨리 먹어치워 할 게 우선이다. 어디 나만 그러겠는가. 살림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럴 게다.  

 오늘도 평소의 일과를 어김없이 하면서 평소처럼 틈틈이 넋을 놓았다. 소파에 누워서 얼마간, 베란다 문턱에 서서 얼마간, 부엌 식탁에 앉아서 얼마간 멍을 때렸다. 그러고 앉아 있으면 고삐 풀린 상념들이 중얼중얼 내게 말을 걸어온다. 나는 그 정신없는 것들을 붙였다 떼었다 해체했다 조립했다 하면서 마음판에다가 글을 쓴다. 쓰다 보면 물음표가 많은 날이 있고, 느낌표가 많은 날이 있고, 말줄임표가 많은 날이 있는데 오늘은 괄호가 많은 날이다. 무언가 부족해 자꾸만 부연설명을 달아야 할 것 같은 날. 주렁주렁 구질한 해명이 늘어 몹시 구차스러워 지는 날. 

        

 

 

Laurits Andersen 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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