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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양 Nov 13. 2020

그을음

-내면 일기-

언제 이렇게 자랐나 싶게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다. 어깨에 닿는 것마다 제멋대로 휘어 사방으로 뻗쳤다. 고무줄로 묶을 수 있을 정도인지 손으로 한번 쓸어 올려 봤다가 화들짝 놀라 손을 놓았다. 거울에 훤히 드러나는 얼굴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렵다.

 울 빨래를 하기엔 세탁 감이 모자라 사흘간 입고 벗어놓은 파란 스웨터를 다시 주워 입었다. 그 밑에 받쳐 입을 요량으로 옷장에서 흰 바지를 꺼내 입었다. 문득,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조화 아니면 낡은 것을 은폐하고 새로운 것인 양 가장하는 것이냐 하는 물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나는 정말이지 하등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됐건 결국 말 붙이기 나름인데. 그럼에도 실소가 터진다. 이토록 쉽고 허무하고 감쪽같은 것에 대하여.

 냉동실에서 아무도 손대지 않는 시나몬롤을 하나 꺼내 녹인다. 되도록 많이 나눠먹을 요량으로 되도록 많이 만든 것이 볼썽사납다. 그것이 하나씩 내 배속에 들어와 소화될 때마다 나의 민망함은 줄고 고독은 자란다.

 간밤에 책장에 꼽아놓은 명상집을 도로 꺼내 밑 줄 친 부분을 다시 읽는다. "사람들이 오지 않아 비어 있음에 대해 장황하게 수다를 늘어놓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홀로 고독을 택하기로 결심한 혼잡한 기대에 가장 죄는 이제 고독 속에 잠기려 하는데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것이리라"(토머스 머튼).

 얼마나 오래 정신을 놓고 거실 벽을 바라보고 있었던가. 얼음덩어리 같던 시나몬롤은 허물어지고 빛을 잃은 거실이 어둑하다.

 빈 눈으로 멀거니, 나는 어딘가에서 지고 있을 가을 해의 끝자락을 상상한다.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같고 무엇을 기대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내게 기다리고 기대할 의지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을음 진 마음속에 가물가물한 불꽃이 탄다.


 

Henri de Toulouse-Lautrec, Woman Sitting on a Divan, 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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