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이렇게 자랐나 싶게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다. 어깨에 닿는 것마다 제멋대로 휘어 사방으로 뻗쳤다. 고무줄로 묶을 수 있을 정도인지 손으로 한번 쓸어 올려 봤다가 화들짝 놀라 손을 놓았다. 거울에 훤히 드러나는 얼굴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렵다.
울 빨래를 하기엔 세탁 감이 모자라 사흘간 입고 벗어놓은 파란 스웨터를 다시 주워 입었다. 그 밑에 받쳐 입을 요량으로 옷장에서 흰 바지를 꺼내 입었다. 문득,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조화냐 아니면 낡은 것을 은폐하고 새로운 것인 양 가장하는 것이냐 하는 물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나는 정말이지 하등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됐건 결국 말 붙이기 나름인데. 그럼에도 실소가 터진다. 이토록 쉽고 허무하고 감쪽같은 것에 대하여.
냉동실에서 아무도 손대지 않는 시나몬롤을 하나 꺼내 녹인다. 되도록 많이 나눠먹을 요량으로 되도록 많이 만든 것이 볼썽사납다. 그것이 하나씩 내 배속에 들어와 소화될 때마다 나의 민망함은 줄고 고독은 자란다.
간밤에 책장에 꼽아놓은 명상집을 도로 꺼내 밑 줄 친 부분을 다시 읽는다."사람들이 오지 않아 텅 비어 있음에 대해 장황하게 수다를 늘어놓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홀로 고독을 택하기로 결심한 이 혼잡한 기대에 가장 큰 죄는 이제 막 고독 속에 잠기려 하는데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한탄하는것이리라"(토머스 머튼).
얼마나 오래 정신을 놓고 거실 벽을 바라보고 있었던가. 얼음덩어리 같던 시나몬롤은 허물어지고 빛을 잃은 거실이 어둑하다.
빈 눈으로 멀거니, 나는 어딘가에서 지고 있을 가을 해의 끝자락을 상상한다.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같고 무엇을 기대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내게 기다리고 기대할 의지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을음 진 마음속에 가물가물한 불꽃이 탄다.
Henri de Toulouse-Lautrec, Woman Sitting on a Divan, 18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