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 데 키리코; 알 수 없는 슬픔이 나를 옥죈다-
어느 맑은 가을날 아침, 나는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광장 한가운데 벤치에 앉아 있었다. (...) 내게는 온 세상이, 건물과 분수의 대리석마저도 회복기의 환자처럼 보였다. 광장 한가운데는 책을 손에 들고 긴 망토를 떨쳐입은 단테 조각상이 서 있다. 그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을 난생처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그림자 그림의 구성이 마음의 눈 속에 떠올랐다(조르조 데 키리코).
그러나 왠지, 기차도 기차에 오르려는 두 사람도 영원히 목적지에 당도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림 속 세상은 마치 티브이 화면의 정지 버튼이 눌러진 것처럼 뚝, 하고 멈춰버렸다. 화가의 심리적 시간이 멈췄기 때문이다.
그림의 근경에는 덜 익은 바나나 한 다발이 보인다. 아무렇게나 덩그러니 놓인 그것의 모습이 참으로 쌩뚱스럽다. 이처럼 인과율을 떠나 뭔가 '잘못 놓인' 듯한 오브제는 그림 <멜랑콜리아>에서도 이어진다.
그 슬픔은 나를 지치게 하네. 자네도 마찬가지란 말이군; 그러나 어쩌다 그것을 갖게 되었는지, 그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고 어디서 생겨났는지 난 알지 못한다네; 그런 알지 못하는 슬픔이 나를 채우고 있으니. 자신을 알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해야겠네(셰익스피어,『베니스의 상인』).
도심 광장에 난데없이 출현한 저 고대 조각상을 보라. 어떤 시간과 장소에 자신을 위치시켜야 할지 몰라 망연자실한 채 세상에 등을 돌리고 있다. 사회의 공동체의 일부로서 참여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 자신과만 엉겨 붙고 씨름하는 소외된 자아의 모습이 꼭 저와 같지 않을까.
소크라테스가 말했던가? 음미 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자기 긍정을 잃은 자아는 점차 삶의 의미를 잃는다. 상속받은 세계가 없어 절망한 자아는 한 귀퉁이에서 신음할 뿐이다.
생의 무의미함과 공허함은 존재를 위협하며 삶의 부조리에 눈뜨게 한다. 이는 데 키리코의 궁극적인 관심이기도 하다.
그의 많은 그림이 수수께끼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는 편집증적으로 우리가 항상 스스로 묻게 되는 커다란 질문들, 즉 "세상은 왜 창조되었는가, 우리는 왜 태어나고 살며 죽는가"하는 수수께기를 물고 늘어진다.
데 키리코는 몇 편의 짧은 글에서 "수수께끼" "숙명" "향수" "계시" "놀람"에 대해 말한다. 프로이트가「언캐니」의 초고를 쓰던 시기에, 데 키리코는 세계를 기이함으로 이루어진 수수께끼로 묘사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3
온화한 햇살에 아련한 분위기가 감도는 그림 <어느 가을날의 수수께끼>를 보라. 그리스의 주문(특히 도리스)과 벽을 강조한 건축물, 부서진 조각상, 고대 의상을 걸친 등장인물 등은 신고전주의 양식을 환기한다.
여기에는 그가 가장 순수한 때라고 믿는 시절의 향수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투영된 듯하다. 모호한 것 하나 없이 모든 것이 명석판명한, 즉 데카르트식의 명료한 의식으로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를 찾는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존재론적 증명에 대한 갈구를 엿볼 수 있다. 구체적인 부피와 공간을 차지하는 실체가 있는 존재자로. '삼각형의 꼭짓점은 세개이다', '정육면체의 면은 여섯개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두 평행선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와 같이 언제나 확실하게 참인 존재로서.
그러나 작품 <예언자 Il>가 함의하는 것처럼,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의와 탐구심이 아무리 높다 한들 진리 앞에서 인간은 눈 없는 마네킹과 같을 뿐이다. 마치 태양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없는 것처럼 진리는 영원한 타부이자 수수께끼로 남는다.
큐비즘이 잃어버린 원근법을 부활시켜 합리적인 시각적 질서를 세우고자 했던 데 키리코의 욕망도 이내 소실점을 잃고 흐트러지고 만다. 다만 그는 예술가로서, "예술이라는 이 숙명적 그물로 이 기이한 순간들을 포착"(조르조 데 키리코)할 뿐이다. 환상과 언캐니한 기호들의 집합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이 언캐니한 기호들은 항상 그의 아버지와 결부되어 등장한다. 그의 작품 도처에 퍼져 있는 도구, 이젤, 드로잉은 엔지니어였던 테 키리코의 아버지의 흔적이자 환영이다.
데 키리코는 그의 나이 열일곱 살에 사랑하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존재였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린 나이의 그가 감당하기엔 더없이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편집증과 우울증은 아버지의 부재가 남긴 상흔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우리는 왜 태어나고 살고 죽는가"라는 화가의 진지한 질문의 시발점이 아버지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데 키리코의 아버지에 대한 욕망과 환상, 그리고 콤플렉스는 다양한 제목의 그림을 통해 환기된다. 우리는 "단테의 동상 같은 대리석의 영웅들이 그의 아버지를 대리하는 것"이라는 비평가들의 해석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 대리석을 바라보는 화가의 '응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버지로 표상되는 영웅의 대리석상을 아주 거대하고 압도적인 존재로 표현했다.
한편 죽은 아버지를 자기 삶에 계속 끌어들이는 일, 이 강박적 집착으로부터 해방투쟁을 벌이는 모습도 보인다. 잃어버린 대상이 화가에게 내면화 되면서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박해자이자 유혹자의 모습으로 바라보는 화가의 심리적 함의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기인 된 고통-아버지의 부재와 애정의 결핍-이 제아무리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이라 해도 끊임없이 아버지에게 유혹당하고 싶다는 바람이 뒤섞여 있다. 이러한 양가적 감정은 데 키리코로 하여금 아버지를 상반되게 재현하게 하지만, 실은 둘 다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교묘하게 위장된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대상을 바라보는 데 키리코의 능동적인 행위가 대상에게 바라보임을 당하는 수동적인 입장으로 역전" 되는 순간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4
그렇게 아버지에 대한 상반된 환상으로 날마다 씨름하는 모습이 그림 <탕자>의 모습으로 표출된 게 아닐까.
특별히 이 그림은 데 키리코가『초현실주의 혁명 제1호』에 싣게 위해 요청받은 질문 –가장 인상 깊었던 꿈에 관해 말해달라는 요청-에 답변한 말을 환기한다. "나는 한 남자와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 남자의 눈빛은 수상쩍으면서도 매우 부드럽다. 매번 내가 붙잡을 때마다 그는 조용히 팔을 벌려 빠져나간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힘이 센 팔, 그 힘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팔이다……. 그 남자는 나의 아버지인데, 이런 모습으로 꿈에서 나에게 나타난다"(조르조 데 키리코, 1924).
그러나 마침내 화가는 아버지와(슬픔의 근원)의 싸움을 끝내고 극적인 화해를 이룬 모양이다. 그림 <헥터와 안드로 마체>는 포옹하는 두 마네킹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아가 여전히 얼굴 없는 마네킹의 모습으로 표현된 거로 보건대, 그의 오랜 고뇌가 말끔히 해소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혼자 외롭게 있지 않고, 또 아버지로 표상되는 대리석상과 싸우지 않고 둘(나와 나)이서 손을 맞잡고 포옹을 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낙관적 결말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데 키리코가 일구어낸 극적인 드라마를 우리도 우리의 삶에 구현할 수는 없을까.
우리는 거의 날마다 순간순간의 행복감과 절망감을 맛보며 산다. 기습적으로 찾아오는 아케디아에 빠져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지옥 속에서 오래 헤매기도 한다. 우리의 삶은 왜 이런 행불행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가? 가끔, 이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 신의 장난질 같아서 심히 애통하다.
그렇다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포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세상으로부터, 특히 나 자신으로부터 도피할 것을 종용하는 어두운 목소리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날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상상하며 힘을 낸다 해도 다시 무너질 수 있단 걸 아프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럴 때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한다. 나를 지탱하는 모든 합리적인 사유가 거세당하더라도,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갈 것을 선택하기로 한다. 폴 틸리히의 말처럼, 존재의 힘은 존재의 용기의 행위를 통해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상관없이 우리 속에서 효력을 발휘한다. 용기의 모든 행위-그 행위의 내용이 의심스럽다 하여도-는 존재의 기반이 드러나는 표현이다. 존재 자체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논증이 아니라 존재의 용기다.5
어느 맑은 가을날이다.
나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놀이터 벤치에 홀로 멀뚱히 앉아 있다. 교회의 종탑이며, 아파트 단지며, 가로수 길이며... 날마다 보는 익숙한 풍경인데도 나는 마치 이 모든 것을 난생처음 바라보고 있는 것만 양 새로운 기분에 젖는다. 어쩐지, 내 오랜 불안이 말할 수 없는 전율로 바뀔 것 같다는 기묘한 예감이 든다.
[참고문헌]
정영도, 『칼 야스퍼스의 “니체와 기독교” 읽기』, 세창미디어, 2016.
폴 틸리히, 차성구 옮김,『존재의 용기』, 예영, 2006.
핼 포스터, 조주연 옮김,『강박적 아름다움』, 아트북스, 2018.
한선경,「조르지오 데 키리코 도시정경 연구: 아케디아와 멜랑콜리 개념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미술사 석사학위 청구논문,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