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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양 Oct 27. 2020

한낮의 우울

-조르조 데 키리코; 알 수 없는 슬픔이 나를 옥죈다-

아케디아 

 어느 맑은 가을날 아침, 나는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광장 한가운데 벤치에 앉아 있었다. (...) 내게는 온 세상이, 건물과 분수의 대리석마저도 회복기의 환자처럼 보였다. 광장 한가운데는 책을 손에 들고 긴 망토를 떨쳐입은 단테 조각상이 서 있다. 그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을 난생처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그림자 그림의 구성이 마음의 눈 속에 떠올랐다(조르조 데 키리코).
조르조 데 키리코, <하루의 수수께끼>, 1914

 아무도 없는 텅 빈 놀이터 벤치에 홀로 멀뚱히 앉아 있다.

 한낮의 광선이 교회의 종탑과 들쑥날쑥하게 어깨동무한 건물들과 잎이 풍성한 가로수들을 비춘다. 땅 위로 그것들의 뾰족하고 네모나고 동그란 그림자들이 마치 검정 색종이를 오려 붙인 듯 날카롭고 선명하게 드리운다.

 내 앞에도 그림자가 길게 누워 있다. 엄연히 나를 원천으로 해야 할 것이 나를 벗어나 존재한다. 내 몸집보다 훨씬 크고 시커먼 게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은 꼭 음암한 동굴 같다. 나는 이것이 낯설다. 

 이것은 점점 더 거대해진다. 오래 삭힌 슬픔과 멸시의 기억을 양분으로. 그리고 이제 나는 이것에게 내 자리를 내어주고 송두리째 사라진다.


 한낮에 일어나는 권태와 우울을 일컫는 말, 아케디아(Akedia).1  아케디아에 빠진 자아는 저 홀로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사는 느낌을 받는다. 행복감은 언제나 찰나에 그치고 마는 반면 권태롭고 우울한 감정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기분. 마치 사악한 영에 씐 듯, 자신이 심장이 고동치는 존재임을 잊고 사망의 그림자에 사로잡힌다. 이 형벌과도 같은 고통은 유독 한낮에 극심하다.

조르조 데 키리코, <몽파르나스 역>, 1914

 형이상 회화파2 이자 초현실주의 화가 조르조 테 키리코의 그림에는 아케디아로 고통받는 자아의 내상()이 고스란히 투사되어 있다.

 오후 1시 25분. 그림 <몽파르나스 역>의 시계탑은 지금이 한낮임을 보여준다. 해가 중천에 떴을 시각, 어찌 된 영문인지 건물의 입구는 어둡고 그림자는 길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것 같은데 깃발이 펄럭인다. 저기, 가파르게 경사진 노란 비탈길을 오르는 두 사람이 보인다. 그들 앞으로, 지금 막 기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몽파르나스 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왠지, 기차도 기차에 오르려는 두 사람도 영원히 목적지에 당도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림 속 세상은 마치 티브이 화면의 정지 버튼이 눌러진 것처럼 뚝, 하고 멈춰버렸다. 화가의 심리적 시간이 멈췄기 때문이다.

 그림의 근경에는 덜 익은 바나나 한 다발이 보인다아무렇게나 덩그러니 놓인 그것의 모습이 참으로 쌩뚱스럽다이처럼 인과율을 떠나 뭔가 '잘못 놓인' 듯한 오브제는 그림 <멜랑콜리아>에서도 이어진다.



내 슬픔의 근원을 찾아서

 그 슬픔은 나를 지치게 하네. 자네도 마찬가지란 말이군; 그러나 어쩌다 그것을 갖게 되었는지, 그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고 어디서 생겨났는지 난 알지 못한다네; 그런 알지 못하는 슬픔이 나를 채우고 있으니. 자신을 알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해야겠네(셰익스피어,『베니스의 상인』).

 

조르조 데 키리코, <멜랑콜리아>, 1912

 도심 광장에 난데없이 출현한 저 고대 조각상을 보라어떤 시간과 장소에 자신을 위치시켜야 할지 몰라 망연자실한 채 세상에 등을 돌리고 있다사회의 공동체의 일부로서 참여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 자신과만 엉겨 붙고 씨름하는 소외된 자아의 모습이 꼭 저와 같지 않을까.

 소크라테스가 말했던가? 음미 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자기 긍정을 잃은 자아는 점차 삶의 의미를 잃는다. 상속받은 세계가 없어 절망한 자아는 한 귀퉁이에서 신음할 뿐이다.


 생의 무의미함과 공허함은 존재를 위협하며 삶의 부조리에 눈뜨게 한다. 이는 데 키리코의 궁극적인 관심이기도 하다.

 그의 많은 그림이 수수께끼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그는 편집증적으로 우리가 항상 스스로 묻게 되는 커다란 질문들, 즉 "세상은 왜 창조되었는가, 우리는 왜 태어나고 살며 죽는가"하는 수수께기를 물고 늘어진다.

 데 키리코는 몇 편의 짧은 글에서 "수수께끼" "숙명" "향수" "계시" "놀람"에 대해 말한다. 프로이트가「언캐니」의 초고를 쓰던 시기에, 데 키리코는 세계를 기이함으로 이루어진 수수께끼로 묘사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3

조르조 데 키리코, <어느 가을날의 수수께끼>, 1909

  온화한 햇살에 아련한 분위기가 감도는 그림 <어느 가을날의 수수께끼>를 보라그리스의 주문(특히 도리스)과 벽을 강조한 건축물부서진 조각고대 의상을 걸친 등장인물 등은 신고전주의 양식을 환기한다

 여기에는 그가 가장 순수한 때라고 믿는 시절의 향수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투영된 듯하다모호한 것 하나 없이 모든 것이 명석판명한즉 데카르트식의 명료한 의식으로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를 찾는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존재론적 증명에 대한 갈구를 엿볼 수 있다. 구체적인 부피와 공간을 차지하는 실체가 있는 존재자로. '삼각형의 꼭짓점은 세개이다', '정육면체의 면은 여섯개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두 평행선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와 같이 언제나 확실하게 참인 존재로서.

조르조 데 키리코, <예언자 Il>, 1914

 그러나 작품 <예언자 Il>가 함의하는 것처럼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의와 탐구심이 아무리 높다 한들 진리 앞에서 인간은 눈 없는 마네킹과 같을 뿐이다. 마치 태양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없는 것처럼 진리는 영원한 타부이자 수수께끼로 남는다.

 큐비즘이 잃어버린 원근법을 부활시켜 합리적인 시각적 질서를 세우고자 했던 데 키리코의 욕망도 이내 소실점을 잃고 흐트러지고 만다. 다만 그는 예술가로서, "예술이라는 이 숙명적 그물로 이 기이한 순간들을 포착"(조르조 데 키리코)할 뿐이다. 환상과 언캐니한 기호들의 집합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이 언캐니한 기호들은 항상 그의 아버지와 결부되어 등장한다. 그의 작품 도처에 퍼져 있는 도구, 이젤, 드로잉은 엔지니어였던 테 키리코의 아버지의 흔적이자 환영이다.

 데 키리코는 그의 나이 열일곱 살에 사랑하는 아버지를 여의었다세상에서 가장 큰 존재였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린 나이의 그가 감당하기엔 더없이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어쩌면 그의 편집증과 우울증은 아버지의 부재가 남긴 상흔일지도 모르겠다적어도 "우리는 왜 태어나고 살고 죽는가"라는 화가의 진지한 질문의 시발점이 아버지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조르조 데 키리코, <어느 날의 수수께끼>, 1914

 데 키리코의 아버지에 대한 욕망과 환상, 그리고 콤플렉스는 다양한 제목의 그림을 통해 환기된다. 우리는 "단테의 동상 같은 대리석의 영웅들이 그의 아버지를 대리하는 것"이라는 비평가들의 해석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 대리석을 바라보는 화가의 '응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버지로 표상되는 영웅의 대리석상을 아주 거대하고 압도적인 존재로 표현했다.

 한편 죽은 아버지를 자기 삶에 계속 끌어들이는 일, 이 강박적 집착으로부터 해방투쟁을 벌이는 모습도 보인다. 잃어버린 대상이 화가에게 내면화 되면서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박해자이자 유혹자의 모습으로 바라보는 화가의 심리적 함의로 읽을 수 있다.  

조르조 데 키리코, <탕자>, 1922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기인 된 고통-아버지의 부재와 애정의 결핍-이 제아무리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이라 해도 끊임없이 아버지에게 유혹당하고 싶다는 바람이 뒤섞여 있다. 이러한 양가적 감정은 데 키리코로 하여금 아버지를 상반되게 재현하게 하지만, 실은 둘 다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교묘하게 위장된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대상을 바라보는 데 키리코의 능동적인 행위가 대상에게 바라보임을 당하는 수동적인 입장으로 역전" 되는 순간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4

 그렇게 아버지에 대한 상반된 환상으로 날마다 씨름하는 모습이 그림 <탕자>의 모습으로 표출된 게 아닐까.     

 특별히 이 그림은 데 키리코가초현실주의 혁명 제1호』에 싣게 위해 요청받은 질문 –가장 인상 깊었던 꿈에 관해 말해달라는 요청-에 답변한 말을 환기한다. "나는 한 남자와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 남자의 눈빛은 수상쩍으면서도 매우 부드럽다. 매번 내가 붙잡을 때마다 그는 조용히 팔을 벌려 빠져나간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힘이 센 팔, 그 힘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팔이다……. 그 남자는 나의 아버지인데, 이런 모습으로 꿈에서 나에게 나타난다"(조르조 데 키리코, 1924).



기묘한 예감

 그러나 마침내 화가는 아버지와(슬픔의 근원)의 싸움을 끝내고 극적인 화해를 이룬 모양이다. 그림 <헥터와 안드로 마체>는 포옹하는 두 마네킹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아가 여전히 얼굴 없는 마네킹의 모습으로 표현된 거로 보건대그의 오랜 고뇌가 말끔히 해소된 것 같지는 않다그러나 혼자 외롭게 있지 않고또 아버지로 표상되는 대리석상과 싸우지 않고 둘(나와 나)이서 손을 맞잡고 포옹을 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낙관적 결말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데 키리코가 일구어낸 극적인 드라마를 우리도 우리의 삶에 구현할 수는 없을까. 

조르조 데 키리코, <헥터와 안드로 마체>, 1942

 우리는 거의 날마다 순간순간의 행복감과 절망감을 맛보며 산다. 기습적으로 찾아오는 아케디아에 빠져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지옥 속에서 오래 헤매기도 한다. 우리의 삶은 왜 이런 행불행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가? 가끔, 이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 신의 장난질 같아서 심히 애통하다.

 그렇다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포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세상으로부터특히 나 자신으로부터 도피할 것을 종용하는 어두운 목소리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날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상상하며 힘을 낸다 해도 다시 무너질 수 있단 걸 아프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럴 때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한다. 나를 지탱하는 모든 합리적인 사유가 거세당하더라도,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갈 것을 선택하기로 한다. 폴 틸리히의 말처럼, 존재의 힘은 존재의 용기의 행위를 통해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상관없이 우리 속에서 효력을 발휘한다. 용기의 모든 행위-그 행위의 내용이 의심스럽다 하여도-는 존재의 기반이 드러나는 표현이다. 존재 자체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논증이 아니라 존재의 용기다.  

 

 어느 맑은 가을날이다. 

 나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놀이터 벤치에 홀로 멀뚱히 앉아 있다교회의 종탑이며아파트 단지며가로수 길이며... 날마다 보는 익숙한 풍경인데도 나는 마치 이 모든 것을 난생처음 바라보고 있는 것만 양 새로운 기분에 젖는다어쩐지, 내 오랜 불안이 말할 수 없는 전율로 바뀔 것 같다는 기묘한 예감이 든다. 





   

 

1)'Akedia'(아케디아)는 희랍어로서 우리말로는 '영적 태만', '영적 무기력', '영적 나태'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오늘날 권태(ennui)의 기원이 되었다고 여겨지는 개념이다. 초기 수도승 전통 안에서 이 '아케디아'는 수도승들, 특히 수도승들이나 은수자들이 빠질 수 있는 전형적인 병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 병을 경험한 사람들에 따르면, '아케디아'는 고대 수도승 생활이 직면해야 했던 가장 중대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였다. 특별히 에바그리오 뽄띠꼬(345-399)는 자신의 저서 '프락티코스'(Praktikos=수행,금욕)에서 '아케디아'를 수도승이 빠질 수 있는 여덟 가지 주요 악습들 가운데 하나로 언급하면서 그것이 모든 유혹들의 혼합임을 피력했다(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회).

 아케디아는 데 키리코의 시대에 팽배했던 권태에 대한 원형을 제시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데 키리코 도시정경의 시간 개념을 이해하는 데 유효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도시정경의 공간에서 두드러지는 허무(nothingness), 밝음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는 ‘그림자 이미지(imageofshadow)’ 의 부조리한 특징은 자연적 시간을 벗어나 버린 데 키리코의 수수께끼 같은 도시 광장을 ‘한낮의 무기력’이 만연해 있는 아케디아의 상태로 읽을 수 있다(한선경, <조르지오 데 키리코 도시정경 연구: 아케디아와 멜랑콜리 개념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미술사 석사학위 청구논문, 2005).

2) 형이상화파(pittura metafisica)는 이탈리아의 키리코가 주창하여 카를로 카라, 조르조 모란디 등이 추진한 유파를 일컫는다. 키리코의 사상적 근저에는 독일 낭만파와 프리드리히 니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등 독일 철학에 깊이 기울어 있고, 이것이 그를 독특한 환상과 신비에 넘친 화풍으로 유도해 갔다. 그는 미래파가 가진 다이너미즘을 부정하여 진공을 생각나게 하는 정적한 화면 공간을 그리고, 더욱 큐비즘이 버린 원근법을 이용하여 흉상과 인체 모형과 기하학적 물체의 단편 등을 거기에 배치하였다. 그 화면은 키리코가 말하듯이 '사물의 형이상학적인 심리'를 묘출(描出)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정감의 영역을 뚫어버린 환상은 가끔 초현실주의의 선구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위키피디아).

3) 핼 포스터, 조주연 옮김,『강박적 아름다움』, 아트북스, 2018, 110쪽.

4) 위의 책, 115-121쪽 참고.



[참고문헌]

정영도, 『칼 야스퍼스의 “니체와 기독교” 읽기』, 세창미디어, 2016.

폴 틸리히, 차성구 옮김,『존재의 용기』, 예영, 2006.

핼 포스터, 조주연 옮김,『강박적 아름다움』, 아트북스, 2018.

한선경,「조르지오 데 키리코 도시정경 연구: 아케디아와 멜랑콜리 개념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미술사 석사학위 청구논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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