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도착해 살았던 곳은 어번(Auburn)이었다.
당시 한국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스트라스필드(Strathfield)에서 기차로 몇 정거장을 더 가야 하는 거리에 위치한 곳이었다.
어번은 주로 레바논, 인도, 네팔 출신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였다. 그래도 역 근처 아파트는 편리하고, 깔끔하고, 조용해서 처음엔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땐 처음 와서 아무것도 몰랐던 때였다.
도착 이틀째 되던 날, 외출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탕!’ 하고 큰 소리가 났다.
“이게… 총소리인가?”
순간 몸이 굳었다. 공포가 몰려왔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공간에 들어와 버린 건 아닐까.
낯선 거리의 공기와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가 나를 더 위축시켰던 것 같다.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시드니에서는 가끔 새를 쫓으려고 새총을 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때 내가 들었던 그 소리도 아마 그 소리가 아니었을까 한다.
하지만 사소한 정보도 모르던 때, 새로운 곳의 낯섦 속에서 작은 소음조차 공포로 다가왔던 시간.
그래도 일단 일을 구해야만 했다. 그래야 집도 옮기고, 생활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영어로 된 이력서를 들고 무작정 이곳저곳을 돌았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게 일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한인 커뮤니티 ‘호주나라’를 알게 되었고, 채용 공고를 보고 처음으로 일자리를 얻었다.
동네 빵집이었다. 캐셔와 바리스타 업무를 겸해야 했다.
사장님은 처음부터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아르바이트생들하고 잘 어울리지 못하면, 나도 채용을 못 해요.”
불안했지만, 그래도 일단 해보자는 마음으로 출근했다. 그런데 뭔가 잘 맞지 않았다.
내가 일을 못해서였는지, 아니면 직원들과의 어색함 때문인지, 늘 혼나기만 했고, 그들끼리만 어울려 수군거리는 분위기였다.
직접적인 따돌림은 아니었지만, 묘하게 나를 배제하는 느낌.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몇몇 사람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커피 연습도 스스로 우유를 사 와서 따로 하라고 했다.
출근하면서 돈까지 써야 하는 상황이니 흥미도 사라졌다. 캐셔는 웃어야 하는 자리였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꼭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서 있었다. 결국 사장이 나를 불렀다.
“애들이 너랑 일하는 게 조금 불편하대. 이제 그만 나와 줬으면 해.”
그렇게 나는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해고당했다.
주방에서 일할 때는 손이 빨라서 혼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주방이 아닌 공간에 나와보니, 정말 나는 소질이 없었던 걸까 싶었다.
다시 구직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한인이 운영하는 초밥집이었다.
시드니에서 기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바닷가 근처의 조용한 동네였다.
며칠 일해보니 사장님은 나를 마음에 들어 했고, 숙소도 제공받았다.
주급은 거의 천 불이었고, 숙소 비용도 한 주에 50불. 교통비도 들지 않았고,
일만 하다 보니 돈 쓸 일이 없어서 한 달에 3,500불 정도는 모을 수 있었다.
물론 낮부터 밤까지 일하는 건 체력적으로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당시 내게는 대출금을 갚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어느 날, 은행에서 호주 연락처로 전화가 걸려왔다.
“어… 어떻게 제 번호를 아셨어요?”
엄마가 번호를 알려줬다고 했다.
은행 와 통화를 끝내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경제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만, 넌 이제 어른이고, 네가 벌인 일은 네가 책임져야 해.”
서운했다. 그런데 맞는 말이었다. 나는 이제 어린 나이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의 통화는 내 인생에서 가장 냉정하지만 가장 값진 가르침이었다.
그날의 전화는 내게 책임이 무엇인지, 혼자 서는 법이 무엇인지 가르쳐줬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