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작업량 늘리기
오늘은 실제 작사 작업 과정을 담아보려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의견에 의해 서술된 것이니 일반화할 수 없음을 미리 밝힌다.
작사학원을 다니는 지망생이라면 보통 학원을 통해 데모를 받게 되는데, 학원에 따라 받게 되는 데모곡 수나 의뢰가 들어오는 엔터사가 각기 다르다. 나의 경우 소규모 학원이기 때문에 일주일에 데모가 평균 1~2개 정도 들어온다. 일이 몰리는 시즌에는 하루에 하나꼴로 들어올 때도 있지만 없을 때는 한 달 동안 잠잠한 적도 있었다(이래서 작사가들은 메일함이 잠잠하면 언제 터질지 몰라 두렵다고들 한다). 타 작사학원과 비교해 우리 학원은 제공하는 데모 수가 굉장히 적은 편이긴 하지만, 데모 제공 기간에 제한이 없다는 장점이 있다. 처음에는 부업을 하며 주 2-3회 작업하는 것도 벅찼는데 지금은 작업에 속도가 붙으며 오히려 작업량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 정식 데뷔를 하면 퍼블리싱과 전속 계약을 맺으며 개인적으로 받는 의뢰 건이 확연히 늘어난다고 하니 역시 데뷔가 먼저긴 하겠다.
가사 시안 의뢰는 이메일로 온다. 메일에 아티스트나 앨범 컨셉을 확연히 밝히는 경우도 있지만, 비밀리에 진행될 때도 많다. 마감 기한은 대체적으로 짧은데 하루이틀 안에 작성을 요구하기도 하고, 아주 길게는 5일 정도의 시간을 준다. 가장 중요한 요청사항을 흔히 '리드'라고 부르는데 여기에 어떤 식으로 가사를 써달라는 내용이 담긴다. 예컨대 '이별 이야기',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와 같은 주제를 던져주거나 'love myself’, '자유' 등 꼭 들어가야 하는 키워드를 준다. 앨범 컨셉이 확실한 경우에는 전체적인 앨범 설명과 함께 레퍼런스가 첨부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큰 틀이 잡혀있으니 이에 맞춰 가사를 쓰면 된다. 하지만 리드에 '자유 콘셉트'이라고 적혀있는 경우에는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해 작업을 해야 한다. 상상력은 어떻게 발휘해야 할까?
모든 답은 곡 안에 있다
먼저 데모곡을 들으며 곡의 분위기를 파악해야 한다. 기본적인 정서를 파악 후 어떤 주제가 어울릴지를 먼저 떠올린다. 이 과정이 어렵다면 가사를 잘 모르는 팝송을 골라 개사를 해보면 된다. 내가 쓴 가사와 실제 가사를 비교했을 때 전반적인 정서가 비슷하다면 곡을 잘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음절을 따야 한다. 대부분 데모가 영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요즘은 일본어 비중도 높아지고 있으며, 허밍으로만 이뤄진 곡도 왕왕 있다) 이를 한국어 음절로 변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Christmas는 크리스마스로 읽기 때문에 5음절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발음 되는 건 2음절이다. 이렇게 모든 영어 가사를 한국 음절로 따는데 가사지가 있는 경우엔 작업이 수월하겠지만, 대부분은 따로 주지 않기 때문에 영어 리스닝을 잘한다면 유리하다. 묵음이나 빠르게 지나가는 랩 같은 경우 음절을 놓칠 때가 많아서 나는 이런 부분은 듣기 앱을 통해 배속을 느리게 해서 잡아나간다. 음절을 잘못 따면 기본부터 망가지는 것이니 작사를 하려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부분이다.
그다음부터는 정말로 작가 재량에 따른 작업 하면 된다. 지금까지의 단계만 하더라도 이미 곡을 수십 번 들은 상태겠지만, 곡과 친숙해지기 위해서 몇 십 번을 더 듣는다(그래서 막상 자기 곡이 발매되면 잘 듣지 못한다는 작가님들도 계신다). 나는 작업을 하기로 한 날에는 데모와 친숙해지기 위해 하루종일 데모만 듣는다. 책상 앞에서 뿐만 아니라 샤워를 하거나, 밥을 먹거나, 집안일을 할 때 틀어놓고 흥얼거리다 보면 흔히 '야마'라고 하는 곡마다의 킬링 포인트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그 부분을 실제 가사에서도 잘 살려주면 된다.
곡의 구성을 verse, pre-chorus, chorus, bridge 등으로 나누고 원하는 부분부터 채워나가는데 특히 verse 1의 첫 소절과 chorus 첫 소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소재는 어디서나 얻을 수 있는데 개인적인 경험만을 녹이기엔 한계가 있기에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참고하거나 영화나 드라마 등 콘텐츠에서도 영감을 얻는다. 책에 좋은 글귀가 있으면 필사를 하고, 그때그때 아이디어를 적어놓는 등 메모를 적극 활용하면 좋다. 또한 책도 제목이 중요하듯 작사도 제목이 중요한데, 유니크하고 전체 주제를 아우르는 제목을 뽑아야 한다. K-pop의 경우 때마다 제목 트렌드가 바뀌는데 아시다시피 한 때는 긴 제목이 유행이었던 때가 있었다. 누군가가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제목을 쓰면(백지영- '총 맞은 것처럼'을 생각해 보라) 가사를 보기도 전에 곡에 흥미가 생기기 때문에 픽스에 유리하다.
작사는 글이 아니다
작사는 글쓰기가 아니다. 전개 과정이나 유려한 표현보다는 곡에 잘 붙게 라임을 살려 쓰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발음 디자인이 중요하고, 이건 많이 불러봐야 한다. 때문에 나는 집에서 작업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가끔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는 예쁜 카페에 나가서 일을 하기도 한다. 곡은 스피커를 통해서나 이어폰이나 헤드셋을 쓰고 듣는데 멜로디뿐만 아니라 곡을 구성하는 악기 사운드도 잘 들어놓으면 킥을 살리는데 도움이 된다. 아티스트를 정확히 아는 경우에는 그 사람의 가창법을 파악해 접근하는 것도 방법이다. 선호하는 발음이 있는지를 살펴보거나, 같은 이야기라도 화자가 이 사람이라면 어떤 말투로 이야기할까? 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시적 허용과 같이 음악적 허용이 가능한 부분들이 있어 충분히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기보다는 트렌드를 반영해 사용하지 않아야 할 표현이나 단어를 적당히 거르고, 아티스트의 이미지와 부합하게 가사를 다듬는 게 우선이다. 픽스가 될 때까지 A&R 분들과 소통하며 여러 번 수정을 반복하는 케이스도 많다.
짧은 곡 안에 하나의 이야기를 온전히 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너무 많은 걸 담으려고 해도 정신이 없어지고, 표현이 부족하면 추상적이거나 알맹이가 없는 가사가 된다. 대중들이 보기에 의미 없는 가사인 것 같은 부분도 사실 그 자리에 가장 적확한 표현이기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국어시간 때 배운 온갖 비유법을 활용한 가사도 좋지만 어쩔 땐 직설적으로 꽂아버리는 가사가 더 마음을 울리기도 하고, 단순 의성어의 반복이 중독성을 일으켜 곡을 매력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장면을 묘사할 수도, 감정을 나열할 수도, 대화 형식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는 등 모든 것이 열려있기에 재미있고 또 어렵다. 요즘엔 영어 가사 비중이 늘어나서 적절한 위치에 적절한 양으로 영어를 쓰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데모에 쓰인 영어를 적당히 살려주는걸 제일 추천한다.
곡마다 작업시간이 상이한데 개중에 내가 꽂히는 곡이 있다면 작업이 술술 되어 짧은 시간 내 써지는가 하면, 어떤 곡은 며칠을 붙잡아도 아이디어가 안 나온다. 확실히 내가 듣기에 좋은 곡이 완성도도 더 높은 것 같지만, 지망생의 단계에서는 편식 없이 모든 곡에 도전해 보는 것이 맞다. 걸그룹/보이그룹/솔로/장르에 따라 접근 방식이 다 다른데, 이건 많이 써보고 접해봐야 느는 것 같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음악 앱에 들어가 새로운 앨범들을 들어보고 작사 크레딧을 살펴보는 게 하루 루틴이 된 지 오래다. 채택이 되든 안 되든 스스로 만족하는 결과물을 내고 싶고, 올해는 최소 100개 이상의 시안을 써서 내는 것이 목표다.
좋은 가사는 결국 공감이 가야한다
좋은 가사는 결국 '공감'할 수 있는 가사다. 우리 모두가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을 언어화해서 모두가 노래를 듣고 자연스레 자신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가사. 그런 가사가 음악과 찰떡같이 붙으면 시너지는 배가 된다. 인공지능이 예술과 창작 분야에 손을 대고 있다고 하지만, 인간의 감정은 겪지 않고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다고 믿는다. 언젠가 길거리에서 내가 참여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사람들이 모두 그 가사를 따라 부르는 상상을 한다. 분명 음악은 모두와의 협업이며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힘을 가진 콘텐츠다. 멜로디에 가사가 붙고, 가사에 목소리가 입혀지고, 춤이 만들어지고, 뮤직비디오와 무대가 나오고, 스타일링이 더해져 하나의 문화가 되기까지 아티스트를 비롯해 수많은 제작진이 함께 고생한다. 그러한 거대한 결과물에 비해 작사가의 작업 과정은 매우 고독하고, 그들 스스로도 소속감 없는 '영원한 외부인'이라고 칭하지만 그래도 그 과정에 내가 포함될 수 있다면 성취감이 어마어마하지 않을까. 누군가 내 가사를 통해 힘을 얻는다면 말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사가인 아이유의 노랫말을 적어두며 글을 마친다. 독자 여러분들도 가사가 주는 힘을 느껴보셨으면 좋겠다.
짧지 않은 나와의 기억들이 조금은 당신을 웃게 하는지
삶의 어느 지점에 우리가 함께였음이 여전히 자랑이 되는지
멋쩍은 이 모든 질문들에 '그렇다' 고 대답해준다면
그것만으로 글썽이게 되는 나의 삶이란 오 모르겠죠 어찌나 바라던 결말인지요
내 맘에 아무 의문이 없어 난 이 다음으로 가요
아이유-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