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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와 미련에 대하여

9. 내가 한 선택과 기회비용 인정하기

by 실타래

누구나 가본 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과 미련이 있다. 짧지만 직장인과 프리랜서, 두 가지 길을 살아보면서 비교 아닌 비교를 할 수 있게 됐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없어지고,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주변에선 나보다 더 다양한 길을 만들어가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무언가를 '포기'하고 도전해 본 사람들에게 늘 따라붙는 질문은 '그래서 너 후회 안 해?', '미련 없어?'와 같은 것들이다. 음.. 나의 경우엔 어떨까.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까지 후회는 해본 적 없지만 종종 직장 생활에 미련 아닌 미련이 남을 때가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난 이기적인 X이다

첫 월급을 탄 기념으로 비싼 레스토랑에서 가족과 외식했던 날이 기억난다. 엄마는 이런 곳에서 밥 먹는 건 생애 처음이라며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카카오톡 프로필과 배경 사진을 모두 그날 사진으로 바꾸더니 친구들 단톡방에도 자랑을 하느라 하루 종일 핸드폰 삼매경이었다. 멀리 가야 한다며 투덜대더니 곧잘 맛있게 먹는 동생을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가족을 위해 일하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회사 지원으로 가족들과 함께 건강검진을 받는다는 친구 얘기를 들을 때나, 누군가의 장례식에 회사 마크가 붙은 종이컵이며 젓가락이 신속하고 정갈히 놓일 때 '대기업의 복지는 놓치긴 아까운 거였구나'란 생각을 한다.

명절이면 꼬박꼬박 나오는 상여금으로 할머니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리고, 백화점에서 가장 최고급 과일 바구니를 사들고 오던 손녀는 이제 없다. 가전제품이 오래됐다고 툴툴대는 엄마의 말에 예전이면 회사 복지 포인트로 단 번에 새 제품을 사줬을 테지만, 지금은 못 들은 척 먼 곳만 내다볼 뿐이다. 하다못해 동생 밥 한 끼 사주는 것도 주머니 사정을 신경 써야 한다. 이럴 때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장녀로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과 나의 행복을 위해 가족의 안위를 나 몰라라 했다는 책망이 몰려든다. 언젠가 내가 잘되면- 조금만 기다려줘-라고 자신 있게 말했지만 햇수가 지나면서 부모님은 늙어가고, 나는 초조해진다. 누군가의 자유를 위해 누군가는 희생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대인 관계에서도 죄책감을 느낄 때가 있다. 작업이 대중 없이 들어오기 때문에 친구와 약속을 잡아놨는데 갑자기 당일 마감 건이나 급한 수정 요청이 오면 약속을 취소하고 작업에 임해야 한다. 이렇게 몇 번 약속 파투를 하게 되면.. 그 친구와 내 사이는 서먹해질 수밖에 없다. 만나는 중에 급하게 자리를 파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렇게 주변인에게 난 자꾸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F라도 감정 과잉은 힘듭니다

mbti F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나 일할 땐 T야!" 그만큼 공과 사를 잘 구분할 줄 안다는 어필인 것 같다. 그러나 작사가의 경우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가사를 쓸 순 없다. 작업할 때만큼은 주어진 감정과 상황에 몰입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기분이 최고 좋은 상태에서도 처절한 이별 경험을 떠올리며 슬픈 가사를 써야 하고, 죽을 만큼 우울하지만 미치도록 신나는 가사를 당장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이러한 감정 기복이 반복되다 보면 꽤 힘들다.


물론 컨트롤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지만, 아직 단련이 덜 되어서인지 난 곡의 무드가 내 기분과 직결될 때가 많다. 회사를 다녔다면 워라밸이나 정신 건강을 위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을테지만 이젠 나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최근에는 명상이나 요가 등을 시도해보고 있다.


끝없는 자기 증명은 스스로를 옭아맨다

프리랜서는 언제 일이 끊길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사는 존재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발전은 필수적이다. 사실 커리어에 있어 이런 업의 특성은 내게 큰 단점으로 와닿진 않는다. 기분 좋은 부담감이랄까. 아무런 발전 없이 연차만 쌓이고 월급에 취해 자위하는 어른이 되고 싶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퇴사 전 팀장님이 하신 말씀이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아있는 건 왜일까.

-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요즘엔 n잡러도 많잖아요.

- 하는 일이 많은 사람은 단지 하나로는 제대로 밥벌이가 안되니까 이것저것 하는 사람일 뿐이야.


그러나 다른 영역에 있어서의 자기 증명은 조금 버겁다. 예를 들면 결혼 시장에서 나는 이제 아무런 메리트가 없다. 반듯한 직장도,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자격도 없는 미래가 불확실한 여자 1 일 뿐. 이 나이가 되니 슬슬 주변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데 나는 아직도 내 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다. 오히려 회사 안에 있을 땐 이런 사회적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는데, 밖에 나오니 신경 쓰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 덧붙여 회사원일 땐 다양한 곳에서 소개팅이 많이 들어왔는데 프리랜서로 지내는 지금은 이성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다. 고립되어 살다 보니 인간관계 능력도 떨어지는 느낌이고.. 연애 산대에게 이러한 나의 삶과 가치관을 설명하고 이해해 달라고 할 욕심도 없다. 자기 관리에 더불어 사랑도 노력해야 한다니 참 쉽지 않은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서 다시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난 지금과 같은 결정을 할 것이다. 작사와 퇴사는 별개의 결정이었다. 안정된 품을 떠나 진취적이고 자율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 작사로 먼저 성공을 하고 다른 것들을 순차적으로 도전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올해 생각이 바뀌었다. 품고 있던 것들을 지금 당장 하나씩 도전해 봐야겠다.


작가 이슬아 님, 마케터 알로하융님, 유튜버 유네린님 등 내가 닮고 싶은 삶을 모습을 가진 독립적인 여성들이 많다. 무언가 결정을 앞둔 분들이 있다면 기회비용은 항상 발생하기 마련이다. 업의 장단점을 잘 살펴보고, 꿈꾸는 삶의 모습을 먼저 실현한 사람들을 참고해보자. 현실적으로 수익 파이프라인을 구축하고 원하는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대는 아직 젊다. 머릿 속에 있는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고 두 손으로 실행할 때 모든게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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