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10cm-너에게 닿기를
[통화 중 00:00]
- 어어.. 나 누워서 팩 하는 중. 카톡 뭔데. 그래서 뭐. 사귀기로 했다고? 말해봐. 고백은? 하긴- 요즘엔 딱히 고백이랄 게 없고 서로 마음 확인하면 사귀는 거지. 그런 거에 설렐 나이도 지난 것 같고. 이젠 프러포즈받을 나이지ㅋㅋㅋ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가 더 도키도키 하지 않았냐? 야 뭐래~ 언니 전성기는 초등학생 때였어. 2학년 때였나? 그때 남자 애들이 이상하게 좋아하는 사람한텐 누나누나 거리더라. 남자애 두 명이 절친인데 서로 나 좋아해서 맨날 집으로 등교 같이 하자고 찾아오고~ 편지에 자기 집 약도 그려서 주고 그랬다. 그래, 걔네 라이벌이었다니까! 둘 다 안경 썼었는데 얼굴이 잘 기억이 안 나네. 우리 엄마 말론 크면 잘생길 얼굴이었다나? 말도 마. 나한테 윤도현의 사랑했나 봐도 들려줬어. 아니 아니 불러준 거 말고 이어폰으로 들어보라고. 비 오는 날 우리 아빠 차 안에서 교회 가던 길에. 그때부터 내가 이 노래 엄청 좋아하잖냐. 또 어떤 애는 비 오는 날 나 비 맞지 말라고 자기 우산 대신 쥐어주고 뛰어갔는데 펴보니 찢어진 우산이더라..? 이건 좋아한다는 거냐, 아닌 거냐?
[통화 중 06:31]
- 더 레전드는 중학생 때임. 캬- 이때가 내 첫사랑의 시작이었는데. 넌 네 첫사랑 기억나? 햇빛 쨍쨍한 날이었는데 어떤 애가 내 앞에서 신발끈을 묶고 있었어. 다 묶곤 일어서면서 고개를 딱 드는데 미친... 겁나 잘 생긴 거야. 진짜 말 그대로 후광이 비추더라. 키도 크고 모찌모찌한게 딱 내 스타일. 어릴 땐 순하고 귀염상이 좋았나 봐. 그날 이후로 걔를 좋아하게 됐는데 알고 보니 친한 남사친의 친구더라?! 그래서 걔를 빌미로 친해져 볼까 했었는데 이미 잘생긴 걸로 인기가 많아서 범접 불가. 말 한마디 나누기도 어려웠어. 아 사진이 어딨 어ㅋㅋㅋ 나중에 우리 집 오면 졸업 앨범에서 찾아줄게. 우리 반하고는 층도 달라서 마주칠 일도 거의 없었어. 괜히 걔네 반에 친구라도 만들어서 어떻게든 보러 가곤 했는데 고백은 못했어. 근데 보기만 해도 좋더라. 아쉬운 마음에 빼빼로 만들어서 졸업식날 자리에 올려두고 온 게 다야. 이미 책상에 엄청 많이 쌓여있던데? 첫사랑은 안 이뤄진다는 말이 맞나 봐~ 걔는 나 기억이나 할까? 나만 아련한 추억이겠지 뭐. 졸업하곤 금방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갔어. 야, 갑자기 왜 이렇게 시끄러워? 아 세림이야? 세림이랑 인사 좀 하자!
[통화 중 12:17]
- 넌 남사친/ 여사친이 존재한다고 믿어? 난 있다고 생각하거든. 근데 예외가 있기는 한 듯? 이게 더 재밌는 얘긴데 들어봐 봐. 아까 내가 좋아했던 애가 내 남사친의 친구라고 했잖아. 그 남사친이 어느 순간 나를 좋아하는 티를 내기 시작했던 때가 있었어. 심지어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남자란 존재는 이해가 안 간다니까? 내가 눈치가 없는 게 아니고 우리가 붙어다니긴 했어도 이성적인 그런 건 전혀 없었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자연스레 멀어졌는데 걔가 약간 중학교 짱.. 같은 거였거든? 일진은 아니고 그냥 키 크고 힘세고 성격 막 우락부락해서 애들 잡고 다니는. 그래서 똘마니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가 키기 엄청 크고 하얘서 눈에 잘 띄었단 말이야. 우리 여고였잖아. 어느 순간 걔가 우리 학교 정문에 보이기 시작하더라? 헐, 너도 기억나? 그래 걔-. 쟤가 왜 왔나 의아했지만 모른 척하고 지나갔지. 근데 너도 알다시피 학교 축제에도 왔었잖아. 사실 나를 찾고 있었대. 그 남사친이 시켜서. 내가 고등학교 오면서 번호도 바꾸고, 싸이월드도 폐쇄했거든. 연락할 방법이 학교 앞에 어슬렁 거리는 것 밖엔 없었나 봐. 그렇게 걔를 통해서 일 년 만에 남사친을 만났는데 얘가 좀 성숙해진 느낌이더라고. 같이 산책하는데 처음으로 걔한테 살짝 설렜어.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락을 주고받게 됐지. 근데 며칠 뒤에 교실로 모르는 여자애가 찾아왔어. 그 남사친을 아냐면서.
[통화 중 22:45]
- 여자친구였냐고? 아니. 자기는 그 남사친의 여자친구의 아는 동생이래ㅋㅋㅋ 몰랐는데 걔가 연상 여자 친구가 있었나 봐. 근데 웃긴 건 그 여자 친구가 나를 알고 있었대. 걔가 사귀는 동안 내내 내 얘기를 했다 하더라고? 진짜 이상한 놈 아니냐.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걸 밝혔는데도 그 언니가 걔를 너무 좋아해서 만나게 됐대. 그러다 내가 다시 등장하니 이 언니가 불안해졌나 봐. 그 친구를 시켜서 나한테 부탁하러 온 거야. 흔들지 말아 달라고. 부탁인지 협박인지...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그 뒤로 한 번도 걜 만난 적 없어. 쫄아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얼마나 걜 좋아하면 이렇게까지 할까 싶더라고. 나도 누군가를 한 번 좋아해 보고 난 뒤라 그 마음이 너무 귀해서 존중해주고 싶었어. 그 언니보다 걔를 더 좋아할 자신도 없었고. 그래서 그냥 일방적으로 연락 끊어버렸어. 나중에 동창들한테 들어보니 걔가 몇 년 동안은 내 욕 무진장 했다고 하더라ㅋㅋ 나쁜 계집애라고. 그 후로 딱 한 번 등교하는 버스 안에서 창문 밖으로 우연히 걔를 본 적이 있어. 반갑게 인사하고 싶은걸 꾹 참았다. 아직도 걔 얼굴이랑 목소리 생생하게 기억하는 거 보면 친구로서 내가 참 많이 좋아했었나 봐. 그 언니가 아니었다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 모르겠어.
[통화 중 30:18]
- 10대는 풋풋했고, 20대는 깜찍했다. 재밌냐? 부럽긴. 남자 친구 생긴 건 넌데 부러운 건 나지. 글쎄.. 20대엔 너도 알다시피 내가 연애를 안 쉬었잖아? 이런저런 고백들을 받아봤지. 립스틱이나 시집 주면서 사귀자고 하거나. 그동안 너 만나려고 기다려왔던 것 같다, 놓치면 후회할 것 같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등 멘트 치거나. 기다리기 싫어서 내가 먼저 지르거나였어. 들어봤던 고백 중에 기억 남는 게 두 가지 있는데 결과적으로 다 내가 거절한 케이스였어. 응, 어떤 면에선 연애보다 더 기억에 남지. 한 명은 나랑 다른 도시에 살던 친구였어.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하는 사이. 장학 프로그램에서 알게 된 사람이었는데 서울 올 때마다 맛있는 거 먹고, 사진도 찍고, 노래방도 가고 같이 잘 놀았어.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라 날 좋아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우리는 하는 일도 너무 달랐고, 성향도 달랐거든. 근데 어느 순간 주고받는 전화가 늘면서 오히려 이 다름이 매력으로 작용했나 봐. 어느 날 얘가 전화로 자기 맘을 우다다 쏟아내더라고. 많이 좋아한다. 근데 넌 나한테 맘 없는 게 너무 보여서 몇 년간 너무 힘들었다. 앞으로 너랑 연락을 안 할 거다. 차단할 거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길래 알겠다고 했어. 사실 많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모른 척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몇 달 뒤에 걔한테 갑자기 전화가 왔어.
[통화 중 37:09]
- 잠만. 목마르다. 물 좀 마시고...ㅋㅋㅋㅋ 아유 더워. 혹시 선풍기 소리 들려? 시끄러워? 스피커 폰이긴 해.
아무튼 전화가 왔는데 받진 않았어. 근데 하.. 너도 아이폰 쓰니까 알지? 가끔 통화목록 잘못 눌려서 전화 가는 거. 부재중 목록이 눌려졌는지 걔한테 콜백이 간 거야. 난 통화가 연결된 줄도 몰랐어. 근데 하필 내가 엄마랑 심하게 말다툼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 내용을 걔가 다 들었던 거야.. 걔도 이상하면 끊어야 되는데 꽤 오래 듣고 있었더라고.. 나중에 통화목록 확인하고 얼마나 멘붕이었는지 알아? ㅠㅠㅠ 너무 창피해서 이번엔 내가 걜 차단했잖아 ㅠㅠ 고백과 동시에 차단으로 도배되어 기억에 남는 썰이지... 두 번째는 내가 아르바이트할 때 알게 된 사람인데 나 휴학하고 알바 두 탕씩 뛰었었거든. 돈 모으느라고. 점심엔 식당, 저녁엔 피시방, 주말엔 과외 이렇게 돌렸었는데 식당이 법원 근처라서 변호사들이나 법원 관계자들이 점심시간에 많이 왔거든. 단골이 정해져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장발의 남자가 혼자 찾아오기 시작했어. 누가 봐도 예술인의 면모가 팍팍 풍기는 그럼 사람 있잖아. a.k.a 장발맨이라고 하자. 이름도 나이도 모르거든.
[통화 중 46:55]
- 장발맨은 피크타임이 끝날 때쯤 혼자 와서 늘 볶음밥을 시켜 먹는데 특이 사항은 항상 주방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식사하시곤 그릇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가셨어. 사장님 부부가 하시던 식당이었는데 그분 들하고 친하기도 하고, 사모님이 워낙 미인이셨어서 내가 농으로 사모님 보러 매일 오시는 것 같아요~ 사장님 긴장하셔야겠어요 했지. 나한테도 여기 주말에도 하냐, 몇 시까지 영업하냐 물어보셔서 여기 음식이 진짜 입맛에 맞으셨나 보나- 찐 단골이나 보네- 정도 생각했는데. 밸런타인데이 날 카운터에서 계산하면서 나한테 슬쩍 초콜릿을 주고 가시는 거야?! 보니까 뒤에 쪽지가 붙어 있더라? 가게 영업시간 물어본 건 내 근무일이나 퇴근 시간이 궁금해서였다면서. 애인이 있냐고 물어보는 내용이었어. 진짜 상상도 못 했다. 그때 당시 만나던 사람이 있어서 다음에 오시면 거절해야지~하고 피시방 알바 하러 갔는데 식당에서 피시방까지 거리가 꽤 있었거든? 동네가 달라서. 근데 너무 신기하게도 피시방 바로 앞에서 그분을 딱 마주친 거야. 나는 너무 신기한 마음에 눈이 ㅇ.ㅇ 이렇게 커졌는데 그분도 어버버 하다가 갈 길 가시더라고? 서로 당황했던 것 같아. 그날은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 뒤로 한동안 그분이 식당에 안 오셨어.
[통화 중 58:23]
- 미쳤다. 우리 거의 한 시간째 통화 중이야. 남자 친구한테 연락 안 와?ㅋㅋㅋ 도파민 뿜뿜이지? 알았어 마저 해줄게~ 며칠 뒤에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 출근했는데 사장님 부부가 편지 하나를 건네주시는 거야. 장발맨이 주고 간 편지였어. 꽤 장문이었는데 내용은... 다신 날 보러 오지 않겠다는 거였어. 그날 우연히 피시방 앞에서 마주쳤을 때 내 표정이 너무 당혹스러워 보였대. 그래서 순간 내가 자기를 스토킹 한다고 오해하나 싶더라는 거야. 그런 거였으면 오해를 풀고 싶고, 그런 게 아니더라도 혹시나 자기가 마음 표현한 게 부담스러웠다면 미안하다고. 자기는 예술하는 사람인데 작업실이 그쪽이었대. 정말 우연히 마주친 거라면서 그동안 고마웠다고 적혀있었어. 맨날 집, 작업실만 오가며 침침했던 삶에 누군가를 좋아해서 한 줄기 빛이 들었대. 밝게 웃으며 일하는 모습에 자기도 기분이 좋아졌고, 그렇게 자꾸 내가 떠올라서 찾아오게 됐다나.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면서 행복하게 지내라는 마지막 인사가 적혀 있었어. 이 쪽도 아까처럼 고백하자마자 바이바이지? 일부러 내가 없는 주말에 와서 편지만 전해주고 간 건데 난 진심이 가득해서 참 고마웠어. 우연히라도 만나면 오해한 적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잠시나마 누군가의 뮤즈가 되본 경험 멋지지 않냐고~ 이게 무슨 인터넷 소설도 아니고.
[통화중 01:01:00]
-이런저런 얘기하다 보니까 내가 누군가의 마음에 살았었다는 게 참 감사하네. 찰나더라도 그 순간들만큼은 또렷이 기억하고 싶어. 연애로 이어지지 않아서 더 소중하게 여겨진달까. 모두들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고 사는지 문득 궁금해지네. 그래, 너도 예쁜 연애하고. 누가 나를 좋아하고, 나도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 그렇게 둘의 마음이 맞아지는 순간은 참 특별한 거잖아. 그 시간 속에 오래오래 살아. 아유 나도 졸리다.. 응, 또 카톡 할게!
[통화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