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퇴사 사유는요,

BGM: 사이먼 도미닉-Me No Jay Park

by 실타래

상기인은 하기의 사유들로 인하여 사직하고자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사유 1.

본인은 요즘 퇴근길 지하철에서 음악 감상은커녕 핸드폰을 쳐다보지도 않고 멍만 때리면서 가는 날이 잦습니다. 종일 사람들에 시달리니 잠시라도 고요를 유지하고 싶어서입니다. 오늘은 연로하신 할머니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천천히 내리시는데 순간 피곤한 마음에 너무 답답해서 속으로 못된 말을 내뱉곤 깜짝 놀랐습니다. 본인은 누구보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활동에 앞장서던 사람이었습니다. 몇 초 빨리 집에 간다고 해서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허나,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인류애, 타인을 향한 배려, 여유등을 상실했습니다. 제가 되고 싶은 모습과 너무나도 달라진 지금의 저를 되돌리고 싶습니다.


사유 2.

얼마 전 발급한 카드 수령을 위해 카드 배달원님과 시간을 조율해야 했습니다. 이번 주는 유독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바빴고, 계속해서 진행되는 회의와 잦은 야근 때문에 시간 조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늦은 시간대로 약속을 잡으려 문자를 주고받는데, 배달원님이 6시에는 퇴근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녁은 꼭 우리 애들과 먹어야 해서요. 애들이 기다려요. 죄송합니다.'

연락을 받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제가 뭐라고. 서둘러 배달원님을 마주하러 가는 길에 간단한 빵과 음료를 사서 가족분들과 저녁 시간에 나눠 드시라고 전해드렸습니다. 저희 엄마와 비슷한 연령대의 여사님이 본인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 과하다며 거절의 손사래를 치셨지만 손에 꼭 쥐어드렸습니다. 그러고 다시 회사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정작 제 자신도 가족과 함께 둘러앉아 저녁을 먹은 기억이 까마득하기 때문입니다. 걸려오는 엄마의 전화는 거절하기 바빴습니다. 전 무엇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까?


사유 3.

본인은 선임을 정말 존경했습니다. 일을 잘하면서 주변 사람까지 챙기기 쉽지 않은데, 그분은 그걸 해내셨습니다. 하나라도 더 배우려 매일 그분을 눈으로 좇다 보니 스스로는 얼마나 힘드실지 알 수 있었습니다. 끼니도, 휴일도 따로 챙기지 않고 회사 업무를 신경 쓰면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모두 케어하셨고, 덕분에 하루가 다르게 메말라가셨습니다. 하지만 선임은 윗분들 정치싸움에 희생양이 되어 이곳을 떠나셨습니다. 그제야 선임이 제게 해주셨던 단 하나의 충고가 떠올랐습니다. "배우는 건 좋은데, 나처럼 일하지는 마. 그러라고 하고 싶진 않아."

롱런하시는 선배분들은 제가 퇴사 고민을 할 때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일만 하면 회사 생활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월급도 제때 나오고 복지도 좋으니, 적당히 일하다 결혼하면 되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죄송하지만 그 조언은 듣지 않겠습니다. 더 이상 당사에 제가 존경하고 따를만한 분이 없습니다.


사유 4.

맹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활을 만드는 사람이 방패를 만드는 사람보다 착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그가 만든 화살이 사람을 상처 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반면, 방패를 만드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사람을 잘 보호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본인이 했던 일은 화살과 방패 사이를 외줄 타기 하는 일이었습니다. 직위상 유관부서나 담당 알바분들께 갑질이라면 갑질을 할 수 있었고, 신경 쓰지 않으면 편한 일도 많았습니다. 전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직 어려서, 마음이 약해서라는 이유를 대신다면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먹고 마음이 단단해진다고 화살을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을 당연시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분들 또한 저희의 동료입니다. 윗분들 커피나 타고, 경쟁업체 현장에 고객인척 전화해 동태를 살피는 것보단 그분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해나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아빠뻘 되시는 분께 전화로 화를 내고, 실적을 쪼는 것도 업무라면 업무겠지만 정말 다른 소통 방식은 없는 것입니까. 회사에서 유일하게 보람을 느꼈던 건 동료 직원분들께 고맙다는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받을 때 뿐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인수인계 부재, 잦은 인사이동, 불합리한 업무 지시, 몰상식한 동료 등 퇴사의 사유는 많지만

저는 제가 만난 사람들로 인해 제 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사람이 사람을 위해 하는 일 아닙니까.


찍-. 이 모든 걸 지우고.


상기인은 개인 사정(업무 부적응 및 건강 상 문제)으로 사직하고자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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