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당분간, 러시아 모스크바
모스크바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남편 회사 동료 집에 초대를 받았다.
얼마나 생경하던지. 오래전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부부 동반 모임을, 그것도 집에서 한다기에 적잖이 놀랐다. 가는 사람도 초대하는 사람도 부담스럽게 무슨 짓이냐며 남편한테 조직문화가 이상하다고 핀잔을 하며 동료의 집에 갔었다.
모스크바 생활 4개월 차, 하지만 이제는 나도 종종 남편 친구들을 초대하곤 한다.
모스크바에서 한국 사람 만나기가 쉬운 일이 아니고, 내가 생각보다 외로움을 아주 많이 타는 사람이고, 외로울 때는 한국음식 놓고 한국말로 수다 떠는 게 최고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같이 둘러앉아 러시아에서 먹고사는 이야기, 러시아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특이점, 먹고 싶은 한국 음식들 같은 소재로 신변잡기를 하고 나면 그래도 한 며칠 동안은 아직도 많은 것이 낯선 모스크바를 살아낼 힘이 생긴다.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할 때는 음식 메뉴가 항상 고민거리다.
한국 음식을 하기에 식재료도 마땅치 않는 나라에서 손맛 부족한 내가 접대용 음식을 차려내자니 여간 고민되는 게 아니다. 나는 레시피대로 음식을 만들어도 음식 맛이 항상 어딘지 밍숭맹숭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100% 레시피대로 만들지는 않고, 레시피보다 설탕도 좀 덜 넣고, 물엿 넣으라는데 건강 생각한답시고 꿀을 넣는 등… 약간의 변주를 하기는 한다)
항상 애매한 음식을 만드는 나지만, 요즘은 여기 러시아에서는 손님 초대하는 데 부담이 조금 덜해졌다. 손맛 없어도 대충 만들어 내놓으면 사람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아주 ‘효율적인 손님상 메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바로 김밥!
모스크바에는 제대로 된 한국 분식점이 없다. 한식당에서 김밥을 팔기는 하지만 가격도 비쌀뿐더러, 회식 장소로 한식당을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탕이나 고기류 같은 술안주 메뉴를 시키는 게 보통이다. 그렇다 보니 한국에서는 바쁠 때 끼니 때우는 용도로 먹는 김밥이 여기서는 은근히 귀한 대접을 받는다.
나 같은 요리 초보자한테 조리 진입장벽도 낮다. 김밥을 몇 번 싸 보면서 깨달은 사실인데, 김밥은 밥만 고슬고슬하게 짓고 단무지만 집어넣으면 얼추 다 맛있다. 다행히도 모스크바 한인마트 어디에나 다른 건 몰라도 단무지는 있다. 집에 있는 소고기나 참치 같은 것을 대충 간해서 준비하고, 단무지만 두툼하게 썰어 있는 재료와 후루룩 말아버리면 이변 없이 훌륭한 손님상 음식이 된다.
김밥이 이곳에서 환영받는 진짜 이유.
이곳에 사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나만의 김밥 이야기’가 있어서 일 거다. 한국의 공기, 한국의 온도, 한국의 기억을 잊고 타지 생활을 하다가 김밥이란 음식을 마주하는 순간, 누구나 김밥에 얽힌 사연을 떠올리게 될 테니 말이다. 대부분은 신나는 기억일 거다. 김밥은 소풍과 나들이의 동반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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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김밥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때 나는 나서는 걸 좋아해서 매년 반장을 했다.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그때는 소풍 때 학급 임원, 주로 반장이 선생님 도시락을 싸가야 했다. 나 때로 말할 것 같으면 스승의 날에 선생님 선물을 사가는 것이 당연했고, 누가 제일 좋은 선물을 갖고 왔는지 학급 친구들끼리 경쟁이 붙는 시절이었다.
소풍날 선생님 도시락은 스승의 날보다 ‘큰 판’이었다. 같은 학년 반장들끼리의 경쟁이었었으니 말이다.
3학년 혹은 4학년쯤이었을 거다. 딸 셋을 낳은 뒤 오랜 경력 단절을 끊고 직장을 갖게 된 엄마가 경기도로 발령을 받아서 혼자 직장 근처로 이사를 가시고, 나와 언니들은 아빠와 할머니와 함께 서울에 남았다. 반장이 되면 아무래도 챙길 것들이 많은데 난 엄마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철없이 반장 선거에 나가서 ‘쓸고퀄’로 선거 유세를 한 끝에 반장이 됐다.
반장이 된 후 처음 맞는 봄소풍. 선생님 도시락이 결국 문제가 됐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큰언니가 당시 대학 신입생이었는데, 큰언니와 아빠가 도시락 미션을 분담했다. 언니가 새벽같이 일어나서 김밥을 싸고, 아빠가 도시락 포장을 해서 소풍날 아침에 내 손에 쥐어줬다.
도시락을 받아 들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창피해서였다.
일회용 은박 도시락 용기에 김밥만 무지막지하게 넣은 뒤, 하얀 전지를 둘둘 말아 ‘선생님 도시락’이라고 손글씨를 적어 놓은 놀라우리만치 단출한 도시락. 도시락의 스펙과 맞지 않게 정자체로 예쁘게 쓰인 아빠의 손글씨가 더 눈치 없어 보였다.
다른 반 반장들은 화려한 도시락 찬합에 1층은 김밥, 2층은 튀김이나 부침류, 3층에는 디저트를 담아 첩첩이 풍성하게 싸가지고 올 텐데, 나는 전지로 포장한 은박 도시락이라니. 투정을 좀 부려볼까 하다가 철없는 막내이긴 했지만 이 상황에 투덜대면 큰일 나겠다 싶은 느낌이 본능적으로 들어서 조용히 도시락을 들고 나왔다.
소풍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선생님께 도시락을 전달해드려야 하는데, 한참을 쭈뼛대다 도시락을 건네 드렸다. 그리고 나서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선생님이 내 도시락을 뭐라고 생각하실까 계속 신경이 쓰였다.
점심시간이 되고. 선생님 도시락과 똑같이 포장된 김밥을 꺼내 친구들과 나눠 먹는 동안 저 멀리 선생님들이 모여 점심 드시는 곳을 계속 흘끗 댔다. 내 도시락이 친구들 것에 비해 꿇리는 것은 신경도 안 쓰였고, 오직 담임 선생님 도시락이 선생님들 것 중에서 제일 초라할 거라는 생각에 조마조마했다. 그날 소풍 점심시간은 유독 길었다.
“도시락 잘 먹었어. 어머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렴”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다행히 다정했던 담임 선생님이 친구들과 모여있는 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셨고, 그제사 나는 김밥 도시락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기억력이 참 안 좋아서 (암기력 말고 과거에 있었던 일을 기억해내는 능력), 어릴 때 일이 대부분 기억이 안 나는데, 이날 김밥 도시락 사건만큼은 또렷이 기억난다. 그날 이후, 나에게 김밥은 절대 신나는 음식이 아니었다. 부끄러움과 민망함을 숨기고 태연한 척 마주해야 하는 과제, 미션 같은 음식이었다.
이제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 그날의 소풍 김밥 도시락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핑 돈다.
창피해서가 아니라 아빠한테 고맙고 죄송스러워서다.
느지막이 얻은 막내딸이 소풍을 간다고 선생님 김밥 도시락을 싸’내놓으라’고 했을 때, 이미 쉰 살을 바라보던 경상도 깡촌 출신의 아빠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아빠 어린 시절 소풍에 김밥이 있었을 리 만무하니 할머니가 김밥을 쌀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막 대학 신입생이 되어 한참 아침잠을 즐길 때인 큰언니를 시켜 김밥을 싸고, 이걸 어디다 담아 마무리해야 하나 요리조리 궁리하다가 은박 도시락을 하얀 전지로 곱게 포장할 생각을 하기까지. 아빠가 얼마나 고심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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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날씨가 이미 춥다. 평균 기온이 10도 안팎이다. 날씨가 추워지면 초대 자리가 더 많아진다.
밤은 긴데 딱히 할 게 없으니 이집 저집 다니며 조촐한 회식을 즐기는 거다. 그래서 앞으로는 김밥을 더 자주 싸고, 먹게 될 듯 하다.
그때마다 아빠의 은박 도시락과 '선생님 도시락' 손글씨의 잔상이 떠오를 것 같다.
그날의 김밥 도시락에 대해서 아빠랑 이야기해본 적이 없는데, 한국에 돌아가면 여기 모스크바에서 갈고닦은 솜씨로 예쁘게 김밥 싸드리며 옛날에 그 김밥 참 맛있었다고 말씀드려야겠다.
[덧붙임]
코로나라는 것은 전에도 없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다고 생각하는 듯한 러시아.
대형 쇼핑몰 놀이터에 다양한 나이대의 아이들이 개구지게 놀고 있고, 러시아 부모님들은 이 광경을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다.
우리나라는 요즘 'With 코로나' 정책을 고민하고 있다는데,
러시아는 이미 'Without코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