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긍정민 Sep 14. 2021

택배 하나 내 맘대로 안 된다

여기는 당분간, 러시아 모스크바


불운이 시작된 건 지난 토요일부터였다.


장고 끝에 드디어 아기 침대를 결정하고 러시아에 있는 육아출산 용품 체인점 ‘마더케어’에 갔다.

매장에 재고가 없어서 인터넷에서 주문을 했고, 토요일까지 배송을 해 준다고 했다.


토요일



토요일 아침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밤 22시 사이 배송 됩니다” 라는 배송 안내 메시지가 왔다.


이 말인즉슨, 난 하루 종일 꼼짝없이 집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거다.

정말 이해가 안 가는 시스템인데 러시아에서 ‘러시아의 쿠팡’이라고 할 수 있는 ‘오존(OZON)’ 같은 대형 온라인 쇼핑몰을 제외하고는 ‘문 앞에 두고 가세요’ 요청이 통하지 않는다.


배송 전에 전화해서 집에 없다고 하면, 물건을 갖고 다시 가버린다. 그리고 언제 다시 약속을 잡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특히 러시아 말 못 하는 나 같은 경우에는 기우제 하는 심정으로 배달원에게 다시 연락이 오길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8월 중순에 러시아에 도착한 EMS 택배를 거의 한 달만인 어제 받았다)



답답하긴 했지만 택배원에게 소개팅 시간 잡듯이 몇 시 몇 분에 날 만나러 올 건지 정하라고 채근할 수는 없는 일.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밤 9시… 택배원한테 전화가 왔다.

드디어 도착했나 보다 싶어서 ‘어디냐’ ‘몇 시에 도착하냐’더듬더듬 러시아어를 했는데,

택배원이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내뱉었다.

얼핏 나한테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좀 더 천천히 말해줬으면 하는 마음에

‘저는 러시아어를 못 합니다. 외국인입니다’라고 말했더니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택배원의 대답.


“그래, 너 러시아어 정말 형편없다”


형편없다는 러시아어로 ‘블로하(влоха)’. 귀에 쏙 꽂혔다.


그러더니 택배원은 뒤이어 ‘내일 배송해주겠다’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내가 잘못들은 건가 싶어 걸려온 번호로 다시 전화를 해봤지만 받지 않았다.


 


 


일요일


아저씨가 선언한 대로 결국 택배는 오지 않았고, 이번엔 택배 안내 문자마저 오지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아기 침대인데 혹시나 못 받으면 너무 서운할 것 같아서 오랜만에 따뜻한 주말 날씨였지만 꾹 참고 집에 있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다 되도록 택배사에서 전혀 연락이 없자 슬슬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나가고 싶다!!! 나가서 스타벅스 디카페인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오고 싶다!’


 한두 시간 뒤면 아침부터 골프 치러 간 남편이 집에 돌아온다기에 그냥 짐을 챙겨서 근처 쇼핑몰에 갔다.

스타벅스도 있고 ‘아샨(aswn)’이라는 러시아 대형 마트도 있는 곳이었다.


아샨에 들어가서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는 쌀도 사고 과일도 사고, 세일하는 냄비, 앞치마까지 샀다.

역시 짜증 날 때는 쇼핑이 최고.


장보기를 마치고 중량 10kg까지 견딜 수 있다는 아샨의 비닐봉지에 물건들을 욱여넣고 나오는데, 뒤에서 러시아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아가씨, 비닐봉지가 아무래도 터질 것 같은데?’

(물론 ‘아가씨’ 까지만 알아 들었고, 나머지 말은 할머니의 시선과 손짓으로 대충 알아들었다)


할머니의 경고를 새겨 들었어야 했는데… 택시 타고 집에 얼른 가면 되지 싶어서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결국 터졌다. 아파트 단지 앞,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우르르르…..


간밤에 온 비가 고인 물웅덩이로 돌진하는 사과를 겨우 쫓아가서 줍고, 흩어진 물건들을 하나하나 모으자니 눈물이 나려고 했다.

유치하고 우습지만,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택배 받고, 장을 봐서 집에 오는 게, 이게 이렇게 힘들 일인가?

- 나만 힘든가?

- 아기를 낳으면 할 일이 더 많아질 텐데 그때는 어쩌지?

- 왜 수업 시간에 배운 러시아어는 일상생활에서는 하나도 쓰이지를 않는 거지?

- 근데 왜 남편이란 작자는 이 와중에 골프나 치고 있는 거지?!!!!  

- 이런 잡다한 문제와 스트레스는 내가 다 처리해야 하는 건가? 남편은 뭐하고?  


 

쏟아진 사과에서 시작된 불평불만이 남편으로 향하고,

남편 생각에 분노가 극에 치닫고 있을 때 고맙게도 단지 앞 경비 아저씨가 비닐봉지 하나를 줬다.


겨우 물건을 주워 담고 집에 들어와 소파에서 분을 삭이고 있는데 남편이 집에 왔다.


' 그래... 택배가 오지 않은 것도, 비닐봉지가 뜯어진 것도 저 사람 탓은 아니지"

주문 외우듯 계속 되뇌며 화를 참았다.



그리고 그날도 결국 택배는 오지 않았다.


 


월요일,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 아기 침대는 어디 있을까?


월요일, 마더케이 고객센터에 문의를 했고, 택배사한테 연락이 올 거라고 했다.

잠시 후 전화가 와서 러시아어 선생님의 말보다 세 배는 더 빠른 속도로 ‘쉼표’ 하나 없이 이야기를 하길래

배려받지 못할 걸 알면서도 ‘나는 러시아어를 못 합니다’라고 말했다.


 몇 초의 정적이 흐르더니, ‘뚜뚜뚜뚜….’


전화가 끊겼다. 전화를 그냥 끊은 거다!


러시아어를 못하니 그냥 불편을 견디라는 건가?


수신 번호로 다시 전화를 해봤지만

‘Do you speak English?’라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객 센터는 계속 전화를 끊었다.



전화하는 걸 때려치우고 화를 삭이러 산책을 나갔다.


소주를 연상시키는 초록생 산펠레그리노 병을 들고 차가운 벤치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쉽지가 않구나. 이방인으로서 일상을 살아내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구나.


러시아라서 유독 더 불편한 건 아닐 거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그 나라 말을 할 줄 모르는 외국인의 삶은 고될 게 분명하다.


다만, 이런 어려움을 곧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새삼 겪으려니 몸과 마음이 많이 부대낀다.

꽤나 유연하고 세련되게 크고 작은 일상의 문제들을 처리하는 ‘한국의 스마트한 장년 여성이었던 내가 택배 문제마저 해결하지 못한다니 우울하고 무기력하다.


 


오늘, 택배사도 계속 연락이 되지 않고, 마더케어에 문의해봐도 마뜩한 수가 없어서 결국 주문을 취소했다.


내가 사려고 했던 아기 침대 모델을 포기하고서라도 직접 가서 들고 올 수 있는 오프라인 매장을 다시 찾아봐야겠다.


내가 형편없는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이방인인 이상, 당분간은 몸이 고생할 수밖에 없다.  





[덧붙임]

몸과 마음이 고된 며칠이었는데, 내 러시아 모스크바 생활의 동반자,

틴틴 열쇠고리의 손이 떨어져 나간 걸 발견했다.


외투를 걸쳐 입는 모양이라, 외출할 때마다 틴틴이랑 같이 나가는 기분이었는데.


그래도 '설상가상'이라는 말은 쓰지 않으려 한다.

이까짓게 뭘 눈보라에 서리라고....


그렇게 생각해야만 한다!!!!

작가의 이전글 러시아에서 원픽 손님상 메뉴는 '김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