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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민 Aug 30. 2021

임신 29주 차, 코로나 백신 스푸트니크V를 맞다

당분간 여기는, 러시아 모스크바


지금까지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무엇을 가장 처음 해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장소, 뜻밖의 순간에 내가 그 최초의 무언가를 해내게 된 것 같다.

(혹시, 만에 하나 나보다 앞서서 이 경험을 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된 것 같다’는 말로 퇴로를 남겨두기로 하자)


 


임신 8개월, 29주 차

고민 끝에 러시아 코로나 백신 ‘스푸트니크V’를 맞았다.


2-3주 전쯤, 러시아 포털사이트에서 6월 말부터 러시아 보건복지부에서 임산부에게 스푸트니크 백신 접종을 공식적으로 허가 및 권장한다는 기사를 처음 봤을 때는 내가 러시아 정부 지침을 이렇게나 신속하게 따르게 될지 몰랐다.


그런데 델타 변이에 대한 분석들과,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델타 변이 감염자를 보게 되면서 마음이 슬슬 동하기 시작했다. 백신 접종자는 설령 돌파 감염이 된다고 할지라도 감기처럼 가볍게 지나가지만 미접종자는 중증까지 발전될 수 있다는 이야기, 또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백신 접종자를 매개체로 미접종자에게 귀신같이 옮겨 간다는 이야기… 코로나에 감염됐을 때 타이레놀 정도를 빼고는 그 어떤 의학적 조치도 취할 수 없을 나에게 델타 변이라는 놈은 호환마마 그 자체였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도 걱정이었다. 벌써 모스크바는 아침, 저녁으로는 20도 이하의 기온이라 여름 동안 코로나 위험을 피해 그나마 외식을 할 수 있었던 식당 테라스 자리가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쌀쌀해지는 날씨에 코로나 걱정을 하는 건 오직 나뿐인 모양... 모스크바 사람들은 아랑곳 않고 늘 그랬듯이 노 마스크로, 아주 사이좋게 둘러앉아 식당 실내에서 밥을 먹고 쇼핑을 하며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이러다간 아기 낳기 전에 걸리겠는데?

그렇다. 여기 러시아 모스크바는 코로나를 피해 갈 수 없는 환경이다.


산부인과 의사에게 이런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백신을 적극 추천했다. 임산부는 고위험군이기도 하고, 지금 시기면 아기 성장에도 전혀 리스크가 없다고 했다. 이곳 의료기관들이 코로나 방역 지침을 매우 잘 따르는지라 과도하게 추천한다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코로나에 걸릴 가능성과 그에 따르는 위험성이 백신의 리스크보다 훨씬 높다’는 의사에 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백신 맞을 날짜를 정하고 나서, 스푸트니크 백신의 제조 원리, 스푸트니크와 동일 제조 방식인 다른 백신의 임산부 접종 상황, 전 세계 임산부 접종률 등등. 안 찾아본 기사가 없다. 스푸트니크 효능이 가장 처음 기재된 의학잡지 랜싯 원문까지 번역기를 돌려가며 읽었다.

‘코로나와 임산부’ 같은 수업이 있었다면 난 분명 과톱을 했을 거다.


하지만 더 많은 정보를 접할수록 더 많이 고민됐다. 모든 기사, 연구 자료가 임산부 백신 접종의 장점을 피력하는데도 점점 더 불안해지만 했다.  


남편은 백신 맞을 날짜까지 잡고도 한숨을 푹푹 쉬며 구글링을 멈추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만 좀 걱정하라고 타박을 했다.



‘나 혼자였으면 부작용 좀 있어도 돼. 근데 아기가 있잖아!'


내가 아니라 아기가 걱정돼서였다.


남편의 타박에 신경질 내며 답하고 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먼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대학교 휴학, 졸업을 미루고 시작한 언론사 입사 준비, 겨우 언론사에 취직을 했다가 반년만에 그만두고 다시 백수 생활을 시작한 것, 그러다 갑자기 직장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지금 러시아 모스크바에 오기까지.


언뜻 생각나는 지금까지 내 인생의 굵직한 결정의 순간에 나는 항상 일관되게 나만 생각했다. 배려심 많은 척, 착한 척해왔지만, 사회생활 ‘패치’ 였을 뿐, 나는 깨나 이기적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될 준비를 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고 본능적으로 아기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아기를 먼저 생각하자면 따져야 할 게 많아질 수밖에 없다. 뱃속의 아기에겐 의견을 물어볼 수 없으니까. 내가 결정해주고 책임져줘야 하니 말이다.


부모가 되면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된다는 건 바로 이런 의미인가 보다.

특히 엄마는 아빠들보다 최소 열 달 먼저, 더 가까이에서(심지어 내 몸 속에서) 그 신세계를 접하며 예전에는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백신 접종 당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다.

그다음 날 근육통과 피로, 37도를 아주 조금 넘는 미열이 있을 뿐 크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아기의 움직임이 평소와 달라지지는 않는지 하루 종일 신경이 쓰였다.


‘엄마는 지금 하나도 안 아프고 컨디션 너무 좋은데, 너도 그렇지?’


아기한테 괜히 씩씩한 척하고, 평소엔 오글거려서 잘 안 보던 태교 동화책도 소리 내서 읽으며 아기의 말을 들어보려 애썼다.

그렇게 아주 긴 하루가 지나가고, 그다음 날 아침. 다행히 열도 완전히 내려가고 평소와 거의 비슷한 컨디션을 회복했다.


 

한국인 임산부 ‘최초’ 스푸트니크 접종 이벤트가 별 탈 없이 끝났다.


이제 9월 중순에 2차 접종을 하게 되면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모스크바의 초겨울을 맞을 수 있을 거다.


 


‘널 위해 현명한 선택을 하고, 또 늦지 않게 너에게 네 삶에 대한 선택권을 넘겨줄 수 있는 엄마가 될게’  


모스크바에 올해 첫눈이 올 때쯤 만나게 될 나의 아이에게 오늘도 말을 걸어본다.




[백신 인증샷]

주사 자체는 그간 맞아봤던 예방주사 중 가장 안 아팠다.

어라, 벌써 놨어? 이런 느낌...


하지만 하도 꼭 쥐어서 힘줄까지 튀어나온 손에서 느낄 수 있듯이, 나는 지금 초긴장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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