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당분간, 러시아
꼬물꼬물
이다지도 사랑스러운 말인 줄 미처 몰랐다.
임신 29주 차.
20주 차쯤부터 뱃속의 아기가 살살 움직이더니 이제는 아주 활기차게 움직인다.
아기가 자세를 바꿀 때 나는 느낌, 다리를 쭉 펴는 느낌, 아기가 쉬할 때 '부르르' 떨리는 느낌, 그리고 조금은 걱정스럽기도 한 딸꾹질 할 때 나는 느낌.
아기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지는데, 그 '꼬물거림'을 느낄 때마다 뭉클하고 행복하다.
꼬물꼬물이란 의태어는 분명 아기 엄마가 만든 말일 거다!
내가 이렇게 될 줄이야.
혈육인 조카들을 빼고는 아이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던 나였다. (언니들은 조카들에게 마저도 무관심했다고 할 수도 있다...)
친구들이 아이 사진을 보여주면 '우.와. 너.무.귀.엽.다' 영혼 없는 감탄을 내뱉곤 했는데 내 아기를 갖고 보니 뱃속에서 아기가 오줌을 눈다는 데도 귀여워서 미쳐버릴 것 같다.
그런데 아기의 사랑스러움에 푹 빠져있다가도 문득 아득해지는 순간이 있다.
육아휴직이 끝날 내년 말을 생각하면 어김없이 우울해진다.
여기가 한국이라면 갓 돌 지난 아기를 떼어놓는 게 가슴 미어지겠지만, 그래도 회사에 복귀해서 워킹맘 생활을 할 텐데, 남편이 러시아에서 최소 4년을 지내야 하다 보니 내년에 회사에 복귀하려면 나만 아기를 데리고 귀국해서 3년 동안 혼자 아기를 키워야 한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렇다고 육아휴직이 끝나는 대로 회사를 그만두자니, 그럼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으로 살아할지 한 없이 고민된다.
얕디 얕기는 하지만 직장이 주는 소속감이 있고,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월급이 있고, 나랑 같은 고민을 하는 직장 친구들, 닮고 싶은 선배, 아껴주고 싶은 후배가 있던 직장을 떠나 내 힘으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무서울 일이기 때문이다.
남편은 내가 이런 걱정을 털어놓을 때마다 지금 미리 고민해봐야 답이 없다며 아기 낳고 천천히 생각하라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는데,
그럴 때마다 '그래, 니 인생 아니다 이거지?'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이 말을 목구멍에서 억지로 다시 끌어내리는 이유는, 이미 이 이슈로 몇 번 대판 싸웠기 때문이다. 당연히 마뜩한 솔루션은 없었다)
그래서 '이제 곧 출산인데 요즘 어때?' 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지킬 앤 하이드가 된다.
뱃속의 아기가 이미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엄마가 되는 게 행복하다고 한껏 들떠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죽을 상이 돼서 '근데 나 성공하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싶은데 앞으로 어쩌지?'라며 급 우울해지는 거다.
어제, 러시아어 과외를 할 때 나이가 지긋한 러시아어 선생님이 이 질문을 했을 때도 난 어김없이 지킬 앤 하이드로 변신했다.
'임신 29주예요, 너무 행복해요' (지문 - 한 껏 들떠서)
'근데, 걱정돼요. 내년에 휴가 끝나요' (갑자기 우울해진 목소리로)
'1년이라고?'
선생님이 의외의 포인트에서 깜짝 놀랐다. 육아휴직이 1년밖에 안되냐는 것.
러시아는 육아휴직이 무려 3년이란다.
물론 엄마의 선택에 따라 더 일찍 복귀하기도 한다지만 모든 공기업 사기업 할 것 없이 의무적으로 엄마에게 3년을 보장해야 한다는 거다.
남편한테 이 얘기를 하니, 본인 팀에도 3년 육아휴직 후 복귀한 직원이 있단다.
법정 스님이었던가? 아이가 만 세 살이 될 때까지는 엄마가 함께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는데 법정 스님이 러시아 정책을 공부하신 건지, 러시아가 법정 스님 책을 읽은 건지. 여하튼 러시아에서 엄마와 아기에게 3년이라는 시간을 보장해준다는 게 놀라웠다.
추가로 찾아보니 육아휴직 1.5년까지는 월급의 40%를 정부와 기업이 육아수당으로 지급하고, 그 이후에는 소액의 육아 수당을 준다고 한다.
군인이나 소방관, 경찰관 등 국가에 복무하는 여성에게는 더 많은 수당을 준다고 하고.
3년 육아휴직이 끝나고 나서의 돌봄 제도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잘 돼있는 것 같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의 정규 돌봄 시간은 보통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고, 그 이후에 퇴근하는 부모들을 위해 발레, 수영, 미술 등등 다양한 특별활동이 제공한다고 하는데, 국립 기관의 경우 정규 시간은 무상, 특별활동비 역시 매우 저렴해서 교육비 부담이 아주 적단다.
워킹맘 친구들에게 한국에서 퇴근시간까지 아이를 '커버'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들은 바 있다.
설령 퇴근시간까지 보육기관에 아이를 맡긴다고 해도 말 그대로 '맡아만 주기' 때문에, 친구들이 다 떠난 어린이집에서 외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뒤늦게 도착한 엄마 얼굴을 보고 울면서 뛰어나오는 아이를 보면 눈물이 핑 돈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러시아 어린이집에서는 부모가 언제 오든, 아이가 있는 동안 눈치 주지 않고 충실히 데리고 놀아주는 모양이다.
여기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한국 엄마들을 통해 들었는데, 아이들이 보통 저녁까지 먹고 집에 오고, 그걸 아주 좋아한다는 거다. 심지어 어린이집에서 더 놀다 오고 싶다고 한다고...
모스크바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젊은 부모가 정말 많아서, 이 나라는 애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의아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낳을만하고 키울만한 거다.
국가별 출산율까지 운운하는 게 좀 과한 것 같긴 하지만...
러시아는 출산율 약 1.5명, 우리나라는 0.8명 정도라고 한다.
우리나라 출산율이 왜 1명도 채 안 되는지, 예비 엄마인 나로서는 충분히 이해된다.
러시아 여성에게도 육아휴직 후 회사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당연히 있을 것이고, 경력단절에 대한 두려움도 있을 거다.
여성이 엄마이면서 경제활동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힘든 일일 것이기에, 임신을 하게 되는 순간부터 세상 모든 여성은 인생 제2막에 대해 고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고민의 시간이 1년인지, 3년인지. 그 간극은 아주아주 크다.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엄마들은 아이가 막 걷기 시작하는 1년 동안 정신없이 육아에 매달리다가 어느새 육아 휴직 종료 시점을 맞고, 더 고민할 시간과 여력도 없이 회사에 복귀해 직장과 아이에게 모두 부채의식을 갖고 살게 된다. 아니면 경제인임을 포기하고 망망대해에 던져지는 기분으로 회사를 그만두거나...
내 아이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 스스로를 돌볼 시간이 조금 더 주어진다면 한국에서 엄마가 되는 것이 덜 두렵지 않을까?
이제 곧 내 아기를 만난다는 생각을 하면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는, 예비 엄마의 긴 한탄이었다.
덧붙임
상추 꽃을 본 적이 있는지!
첫 번째 글에서 러시아에서 상추가 너무 비싸서, 밑동을 화분에 심어 키워보기로 했다고 적었었는데,
그 상추에서 나라는 상추는 안 나고... 꽃이 피었다.
공짜로 상추를 먹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무너지고 엉겁결에 반려 상추를 키우게 됐지만, 소담한 상추 꽃을 보니 씨익 미소가 지어진다.
상추 밑동을 하나 더 심어봐야겠다.
꽃도 좋지만... 이번엔 탐스러운 상추 잎이 나주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