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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민 Aug 14. 2021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 모스크바

여기는 당분간, 러시아

근면성실하면 대한민국이다. 정말 희한할 정도로 열심히 산다.


나는 출퇴근이 좀 자유로운 회사에 다녔지만 전통적 제조기업에 다녔던 남편은 보통 아침 8시까지 출근을 해서 저녁 6시까지 일을 하고, 일주일에 두어번은 밤 9시-10시까지 빡쎄게 회식을 한 뒤 집에 오곤 했다. 그것도 매번 소주로...


퇴근하고 생활인의 삶이 시작되도 바쁘긴 마찬가지다.

퇴근길에 밤 10시까지 하는 회사 근처 요가 학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새벽배송 온라인 마켓에서 장을 보고, 밤 1시까지 하는 집 앞 분식집에서 야식을 사먹은 다음, 24시간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까지 물고 돌아와야 "오늘 하루도 보람찼구먼"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인의 이런 바지런한 라이프스타일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서, 가끔 해외 여행이나 출장을 가면 '한국 사람들은 부지런하잖아' 라는 칭찬? 비슷한 걸 종종 듣곤 했다.


중국 관련된 일을 하느라 중국 출장을 자주 갔었는데, 중국 파트너와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너흰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 땅이 작고 자원이 적어서 그러는 거야?"라는 말을 듣고 엄청 기분 나빠했던 기억도 있다.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외국인에게, 공석에서 '가진 게 없으니 부지런한거구나'라는 예의 없는 추측성 발언을  듣는 건 매우 불쾌했다. 뭔가 그럴듯한 답변을 해주고 싶었지만 우물쭈물하다가 다른 화제로 넘어가버려서, 식사 자리가 끝난 뒤 같이 출장 간 동료들이랑 2차를 하며 한참 중국 욕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소심한 화풀이 였던듯...)


"지나칠 정도로 부지런한 한국인에게 러시아는 얼마나 답답할까?"

모스크바에 도착하기전에 많이 걱정했었다. 상점은 밤 9시면 문을 다 닫고, 배달은 하세월일 거고, 한국인처럼 빠릿빠릿 일하는 직원은 어디에도 없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24시간 영업, 연중 무휴.

모스크바 수많은 상점들이 달고 있는 간판이다.  


우리집 앞 슈퍼마켓부터(편의점이 아니다, 과일/야채/쌀도 파는 어엿한 마트다)

첫번째 글에서 소개한 초대형 마트, 약국, 전자상점, 심지어 가구점까지 24시간 연중무휴고, 음식점이나 술집도 대부분 새벽까지 영업한다.  

백화점이나 대형몰도 밤 10시, 11시에 문을 닫는다.


맘만 먹으면 밤새 먹고 마시고 놀고 할 수 있는 거다.


더 놀라운 건 온라인 마켓. 러시아에도 우리나라 쿠팡과 같은 온라인 마켓  '오존'이라는 사이트가 있는데, 여기서 물건을 주문하면 2시간 내에 도착한다. 모든 물품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생필품은 주문 즉시 배송된다.



이렇게 24시간 쉴새없이 돌아가는 인프라 뒤에는 당연하지만 24시간 움직이는 노동력이 있다.


밤새 우리 아파트 단지 앞을 밤새 지키는 경비 아저씨(심지어 제대로 된 경비 초소도 없다), 마트 알바생, 오존 딜리버리맨까지. 모두 기꺼이 24시간 일해주기에 모스크바의 이 시스템이 유지되는 거다.


"다들 왜 이렇게 열심이에요?"

지금 당장 꼭 필요한 생필품을 파는 마켓이나 약국 같은 건 이해가 가지만, 가구점이나 전자상가는 도대체 왜 24시간 오픈해야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러시아어 과외 선생님한테 물어봤다.


선생님은 난생 처음 받아본 질문이라며 '세상이 그러길 바라니까' 라고 답했다.


그리고 덧붙인 말. '러시아는 인건비가 싸기도 하고'


아닌게 아니라, 러시아의 최저시급이 150루블로 우리나라 돈으로 2000원 수준이라고 하니 심하게 싸긴 하다(2020년 기준, 구글 자료)


24시간 가구점을 생각해보면, 밤새 테이블 하나만 팔아도 아르바이트생 인건비와 전기세, 가게세를 충당할 수 있으니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문을 열어둘만 하다는 얘기다.


정규직 급여까지 포함한 월 평균 중위 소득은 11만 루블, 우리나라 돈으로 200만원 수준. 모스크바 물가를 생각하면 많이 낮다.

첫 글에서 언급했듯 커피 한 잔에 3500원, 외식 한 번 하면 인당 2만원 정도를 써야하니 말이다.

* 참고로 한국 중위소득은 330만원 정도라고


나라마다 그 나라의 사정이 있으니, 이방인의 시선으로 섣불리 러시아 인건비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기 조심스럽다.

또 러시아가 노후 보장 정책도 잘 돼있다고 하고, 고등학교까지 무상 교육에 의료비도 저렴해서 복지가 나쁘지 않다고 하니 이 정도 임금 수준으로도 큰 무리 없이 생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노동의 가치를 이렇게 박하게 매겨도 되나 싶기는 하다.


대학 신입생 때 삼겹살집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이 있다. 몸으로 하는 일도 해봐야 한다는 건방지고 안일한 생각으로 시작했던 일이었다. 친구랑 같이 했는데 나는 3주, 친구는 좀 더 버텨서 4주 동안 일하고 그만뒀다.

하루 종일 기름 냄새를 맡아야하고, 심지어 맥반석 삼겹살집이라 돌판을 일일히 손으로 닦아야 했는데, 시간당 4000원이 안 되는 시급이 너무 부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깃집 사장님은 한달을 못채우고 그만두는 날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거봐, 돈 벌기 쉽지 않지?" 하시고는 3주치 월급을 챙겨주셨다. 정말 작은 돈이었다. (거의 20년전 일이다)


그때도 대한민국 서울은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였고, 24시간 편의점과 식당, 노래방, 독서실이 즐비했다.



불야성 같은 모스크바에 살며, 다들 열심히 일해주니 편하다는 생각만 했었다.

하지만 모스크바 불이 꺼지지 않는 게, 결국은 낮은 인건비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마음이 썩 편하지 않다.


러시아어 선생님 말처럼 세상은 쉼 없는 노동을 원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에 걸맞는 보상을 해줄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여기 러시아 모스크바도. 우리나라도 조금 더.



덧붙임 

나라마다 최저시급도 다르고 노동 환경도 다르지만, 금요일 풍경은 비슷하다.


모스크바강을 끼고 길게 조성돼있는 러시아의 센트럴 파크, 고리끼 파크에는 금요일마다 수많은 인파가 몰린다.


그들이 불금에 하는 건? 바로 스포츠 댄스!

어르신들의 저녁 운동이 아니다. 주말을 앞둔 직장인들이 출근 복장 그대로 고리끼에 모인다.


왠지 우울하고 폐쇄적일 것 같은 러시아의 이미지와 너무 다른 '불금' 단상  




금요일 밤, 이분들도 여기서 신나게 춤 한 번 때리고,

집에 가는 길에 24시간 케밥(샤우르마) 사드시고,

오존에서 주말 먹거리를 쇼핑한 뒤, "이번주도 존버했다" 하며 일주일의 고단함을 털어내시겠지.


여러분, 우리 모두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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