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이 원래는 있냐, 흥양이었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조각들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언젠가 학교에서 배웠던 '딸깍발이'가 생각납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절대 뛰시는 법이 없었고, 밖에 나가실 때면 언제나 정갈한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을 고집하셨습니다. 머리에 기름칠하셔서 예쁘게 넘기셨으면서 꼭, 중절모까지 쓰셨어요.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멋쟁이 주인공처럼, 중절모에 깃털(어떤 새의 깃털인지, 진짜 깃털인지는 결국 알아내지 못했던)까지 꼽으시고 출타를 하셨습니다. 차례를 지내는 날이면 옥색 도포를 입으시고 "유세차 -모월 모일-"로 시작하는 축문을 낭독하시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할아버지도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셨어요. 국민핵교 유강년(국민학교 6학년)이 된 해에 해방을 맞으셨죠. 할아버지와 가만히 앉아 TV를 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나오면 항상 할아버지는 같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옛날에, 일제시대 때는 있냐, 쇠 김金자를 '가네 かね'라 갰어. '김金'씨는 나중에 일본에서 창씨 개명을 허면서 '가네다 かねだ(金田)'라고 바꿔버렸지 안했냐"
"옛날에, 고흥高興이 원래는 있냐, 흥양興陽이었제. 근디 일본말로 하면 흥양興陽이랑 광양光陽이랑 똑같이 '고-요 오-(こうよう)'라고 발음이 됭께, 일본 놈들이 '흥양興陽'을 '고흥高興'으로 바꿔버렸지 않냐"
초등학교 4학년,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할아버지의 건강은 조금씩 안 좋아졌어요. 우리네가 알고 있던 시골 할아버지였기 때문에 요리를 잘하시는 편도 아니고, 식사를 혼자서 잘 챙기지 못하시는 편이었죠. 강직하셨던 할아버지의 건강이 점점 안 좋아지는걸 곁에서 보는 심정은 저도 편치 않았어요. 절대 서울에 올라와 살지 않으시겠다던 할아버지가 어느 날 직접 전화하셔서 이제는 혼자 사는 게 고집인 거 같다. 서울로 올라가마. 하시고 올라오셨을 땐 여러 감정이 겹치더라구요.
올라오시고 나서 6개월 정도 할아버지와 한 집에 살았어요. 그때가 딱 행정고시 준비한 지 2년 차였죠. 잠만 집에서 자고 모든 생활을 신림동에서 할 때였어요.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남동생은 중3. 엄마가 집 근처에서 일을 하셔서, 아침에 할아버지 점심을 차려놓고 나가시거나, 점심시간에 집에 와서 점심을 차려드리고 다시 일터로 나가시기도 했어요. 근처에 사시는 작은할아버지께서도 가끔 집에 들르셔서 할아버지와 말동무를 해주시기도 하셨구요. 그렇지만 우리 집은 할아버지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동네에 있었죠. 거동이 불편하셨던 할아버지는 낮 시간 대부분 집에 혼자 계셨어요.
계속 할아버지를 혼자 계시게 하는 건 모두에게 편치 않은 일이었어요. 중간 과정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할아버지는 나중에 요양병원으로 가셨어요. 5년 정도 요양병원에 계셨죠. 할아버지가 요양병원에 가신 후로 저는 단 한 번도 요양병원에 가지 않았어요. 할아버지의 마지막도 지키지 못했죠. 아버지는 저보고 못됐다고, 나쁘다고 했지만, 무너진 할아버지를 못 보겠더라구요. 할아버지 보면 저도 무너질 거 같았어요. 이기적이지만 무너지기 싫었어요. 저는 똑 부러지는 손주여야 하거든요.
행시를 그만두고 열심히 레스토랑 알바를 다니던 어느 날, 일을 끝나고 락커로 돌아와 보니 엄마에게 전화가 몇 통 와있었어요. 무슨 일이 생겼구나 라는 생각만 했지, 그게 그 소식일지는 모르고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할아버지가 직접 봐 두신 당신 묫자리에 묻어드렸어요. 할아버지 모시고 고흥으로 내려간 날 햇살이 참 좋은 날이었는데. 그 자리가 따뜻하고, 우리 시골집도 보이는 것 보니 참 자리 잘 고르셨단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렇게 가시고 싶었던 고향인데, 돌아가시고 나서야 고향에 오시게 됐구나 싶어서 한참 울었던 것 같아요.
아직 본가에 할아버지 책들이 그대로 남아있어요.
오랜만에 고흥에 가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