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 서늘한 강의실에서

빈 강의실에서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당신을 떠올리며

by 현재 작가

나는 당신을 해가 뉘역뉘역 저무는 도서관 언저리에서, 스터디를 하는 강의실에서, 깜깜한 3층 복도에서, 수없이 지나다녀 문턱마저 닳은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허망한 듯 조용히 강의실 불을 끄고 나가던 당신의 뒷모습도 잊지 않습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수많은 프린트물와 두꺼운 교재도, 당신의 무거운 책가방만큼 무거운 어둠이 내려앉은 빈 강의실도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길기도하고 짧기도 한 대학 4년에 종지부를 찍게 될 당신에게 긴 박수로 화답합니다. 피 끊는 청춘의 시간을 힘든 학문의 길을 걸으며 묵묵히 이겨낸 당신을 축복합니다. 공부는 예나 지금이나 따분하기 이를데 없으니까요. 그러나 수능에 버금가게 매서운 임용고시라는 또 다른 관문이 놓여있군요…… .


임용고시라는 비스무레한 것을 십수년 전에 겪은 경험자로서, 유사 업종에 일하는 선배로서 당신의 어깨에 놓여진 힘겨운 무게가 감히 상상이 됩니다.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혀 질식해버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힘들지? 조금만 참아. 임용고시라는 관문의 끝에는 황금빛 미래와 평생 직장이 놓여 있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 역시 인생에 있어 또 다른 시작이고 삶의 연속이고 반복이니까요. 즉 임용고시 관문을 통과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의 차이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혹시나 당신은 가진 자의, 이미 자리를 차지한 자의 배부른 소리라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겠네요. 당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젊은 우리의 삶이 고단해졌고, 임용고시 경쟁률은 매년 높아만 가고,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암흑 속에 우리는 사회의 첫발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씀하실 겁니다. 그래요, 맞습니다. 저 역시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경험입니다. 누군가를 떨기기 위해 만든 시험 앞에서, 정해진 숫자 이외에는 떨어지는 가혹한 운명 앞에서, 친한 선후배를 경쟁자로 몰고 가는 피 말리는 경쟁 앞에서 당당해 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임용고시 통과 여부를 떠나서 오직 하나 뿐인 당신의 삶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조금 화가 누그러지셨나요.


당신은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차가운 시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절대 고독에 빠져 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큰 깨달음이겠지요. 그리고 앞으로 남은 우리의 삶이 더 찬란하고 향기로워서겠지요. 차라리 졸업생수보다 선발하는 인원이 적은 제도의 모순과 적체된 인원을 계속해서 방치하는 부조리함에 문제를 돌리십시오. 임용고시 통과 여부도 중요하지만 배우고 꿈꾸었던 이곳에서 배운 지식과 교훈을 내 것으로 만들어 앞으로 남은 소중하고 긴 인생에 투자하십시오. 당신은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누구나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영어교사입니다. 그 명예와 자신감으로 한 평생을 사셔도 좋습니다.


당신이 걷고 있고 훗날 걷게 되는 그 길이 꽃비가 뿌려진 비단길일지 가시덩굴이 우거진 가시밭길일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길을 걷든지 나는 당신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비단길에서도 가시밭길에서도 영어교육과 졸업생답게 충분히 잘 해내실거니까요. 그리고 길을 걷다 문득 삶의 언저리에서 다시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작은 실개울이 모여 큰 내천을 이루고 바다를 만들 듯이 바다라는 드넓은 곳에서 서로를 부둥켜 앉는 그 날을 기약합니다. 어떤 모습이든지, 어떤 길을 걷든지 서로 조금씩 겉모습만 다를 뿐 가르치고 배우는 길에서 다시 만날 생각에 가슴이 설레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맛과 향기를 그윽하게 뿜어 올리는 잘 익은 포도주처럼 우리의 빛깔만으로도 서로를 다채롭게 보여줄 테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잘 익은 포도주처럼, 너른 바다처럼 더 깊고 더 넓게 미래의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거니까요.


가을이 지나 매서운 임용고시의 계절의 지나면 또 다시 봄이 오겠지요. 우리 모두의 삶에 따뜻한 봄의 기운이 깃들기를 기원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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