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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자현 Oct 24. 2021

달력은 일인당 한부씩 드려요

전쟁의 시간

저녁시간 어르신들의 집에 방문하여 이야기를 듣는 예능이 한창 하고 있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보게 된 이 프로그램을 나는 지나치기 어렵다. 내 눈길을 끈 장면은 바로 티브이 속 주인공 집 벽면 한가득 걸린 각종 은행 달력들. 여러 개 걸린 달력을 보고 있자니 현기증이 살짝 밀려온다. 아이고 머리야. 저걸 저렇게 많이 달아놓으셨다니… 입사 초기엔 우연히 들린 식당에 우리 회사 달력이 걸려있으면 친근하고 장사가 더 잘되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애사심은 연말이 지나며 싹 사라졌다.  


찬바람이 불면 누군가는 달달한 핫초코를 마신 다지만 우리는 달력을 준비한다. 이제 곧 전쟁이 시작된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 전쟁은 직원들에게 상처만을 남긴다. 영업장에 넘치는 달력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정작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고객들이 계속 기다려야 한다. 거래를 하는 고객들을 위한 일인데 거래하는 고객들이 불편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금융기관의 달력 배부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달력을 무료로 배부하는 이유는 한결같다. 우리 지점을 이용해주시는 고객들에게 감사의 의미를 담아 증정하는 일종에 답례품이다. 금고로 배송되는 달력은 인쇄된 상태로 온다. 그런 그 달력을 직원들이 하나씩 말아서 비닐을 씌워 부피를 줄여 배부에 용이하게 만든다. 달력을 만다고 하는 이 업무는 금융기관 직원이라면 누구나 모두 매년 야근을 하면서까지 끝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일종에 연례행사다. 박스에 가지런히 정렬하여 준비된 달력은 선착순으로 영업시간에 배포가 된다. 문제는 모든 고객들에게 나눠주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많은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든다. 그래서 되도록 많은 고객들이 받을 수 있도록 일인당 한부씩 석착순으로 드리고 있다. 그러나 항상 어디든 진상은 있는 법. 하루에도 몇 명씩 달력 진상을 만나면 인류애가 사라진다. 


방에 하나씩 걸어야 한다며 여러 부를 달라고 예약을 하는 사람들. 내 친구들을 나눠주고 싶다고 여러 부 내 것을 빼놓으라고 하는 사람들. 금고 거래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공짜니까 나도 얘도 달라고 하는 사람들. 선착순으로 배부가 끝나고 와서 내 몫이 없으니 직원 네 걸 달라는 사람들. 디자인이 너무 촌스럽다며 이번에는 그냥 받아가지만 내년엔 더 좋은 것으로 준비하라고 명령하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년 달력을 준비할 것이다. 내년에도 우리 금고 고객을 이용하는 고객님을 위해서, 촌스럽지만 준비해준 마음이 고마워 거실에 사업장에  걸어 주시는 감사한 고객을 위해 계속 준비할 것이다. 물론 일인당 한부씩 드려요.


연초에 은행 달력을 제일 처음으로 집안에 들이면 그 해 재물운이 들어온다는 이야기. 거짓말입니다. 제가 매년 집에 걸어두는데요 재물운은커녕 전 부칠 때만 인기가 좋아요. 그마저도 환경호르몬 문제로 요즘은 사용 안 하는 것 아시죠? 그냥 눈으로 봐주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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