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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은 Sep 09. 2019

본격적인 산통의 시작, 나는 유서를 썼다.

가정 출산이 가장 쉬웠어요-첫 출산





“목소리를 들어보니까 다 된 거 같네”
 30년 경력의 조산사님은 내 목소리만 듣고 출산 임박을 예감하셨다.
 바로 출발하겠다며 전화를 끊으신 게 오전 8시였으니 9시쯤엔 우리 집에 도착하실 테고 10시 전에 아기가 나오겠구나 하고 나는 머릿속 계산기를 돌렸다. 그러나 아기가 나온 시간은 오후 4시 반.


 나는 41시간의 진통 끝에 우리 집 안방에서 첫째를 만났다.


 한참 진통을 하는 동안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나의 통제 속에 있었다. 남편은 나의 지시(부탁)에 따라 움직여주었고 날짜와 날씨까지도 계획대로 였다. 아프지만 행복했다. 많이 아팠지만 견딜만했다는 말이 더 옳겠다.

 

 쨍그랑..!


 “아직 위에 있어”

 집에 오신 조산사님이 내 배를 보고 뱉으신 한마디에 내 귓가엔 환상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직 아기가 덜 내려왔다니! 얼마나 더 아파야 아기가 나온다는 거지! 이건 말이 안 돼!’

 진통이 시작된 지 30시간을 넘긴 때였다. 견딜만한 아픔이었다 해도 체력이 딸리고 있었다.


 조산사님은 양수를 터뜨리자고 제안하셨다. 잠시 고민하다 그러기로 했다. 양수가 터지자 진행이 빨라져 몹시, 몹시, 몹시 아팠다. 그렇게 오전이 다 지나갔다.

 더 이상의 진통은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아기가 아직 위에 있다면 배를 눌러 내리던가 무통주사를 맞고 좀 쉬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의료 개입 없는 자연출산을 위해 집에서 낳기로 작정한 내가 무시무시한 진통 앞에 무너지고 있었다.      

 내가 꿈꿨던 황홀한 출산은 이미 물 건너갔음이 분명했다. 출산 계획 실패는 참담하고 위험했다.

 ‘구급차가 오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그전에 죽을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지금 유서를 써두자. 보험금은 친정엄마가 받으실 수 있게 한 마디 남겨두는 거야’ 발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다.


|| ​유서
 혹시 내가 아이를 낳다가 죽어도 바보라고 손가락질 말아라. 가정 출산은 나와 아기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아기를 생산하다 죽는 일은 숭고하다. 교통사고로 죽는 것보다 자연스럽다. 나는 후회 없다.


 ‘후회 없다. 후회 없다.’

 후회 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죽음이 문턱이라 해도 정말 후회 없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차분해졌다. 글쓰기는 깨어진 멘털을 쓸어 모아 아기와 나의 호흡에 집중하는 계기가 되었다. 역시 극한의 상황에서도 글쓰기는 통했다.


 친정엄마를 위한 메모가 빠졌다고 다시 휴대폰을 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극심한 진통에 내 입에선 말이라는 게 나오지 않았다. 다만 마음속으로 ‘아가야 조금만 더 힘내자.’ 하고 반복해서 되뇔 뿐이었다.

 눈물이 왈칵 터질 것 같았다. 그냥 진짜 너무 아팠다. 배운 사람처럼 표현하자면 이 세상 아픔이 아닌 갈갈이 찢어지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찢어지고 흩어지는 고통이었다.


 인류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출산을 앞둔 모든 어머니들이 경험했을 고통과 고독의 시간이었다. 인류사가 계속될 수 있었던 건 아이를 낳는 여성들이 있어 가능했다. 분명 다들 나만큼 아팠을 텐데 어째서 아직도 소문이 덜났는지 모를 일이다. 아까 유서 쓸 때가 좋았다. 이제부턴 한 마리 위험한 짐승이 되어 울부짖었다.


 ‘이번에 힘주면 나오겠다’

 조산사님은 남편을 불러 아기 머리를 보여주셨다. 남편은 아기가 보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다음 순간 남편 손을 붙잡고 항문으로 온 힘을 쏟았지만 아기는 머리를 쑥 뺐다가 다시 들어가 버렸다. 아쉬울 틈도 없었다. 진통이 다시 밀려왔으니. 다시 한번!! 죽기 살기로 힘을 주니 아기 머리가 쏙 나왔다. 불타는 느낌도 잠시. 스스로 어깨를 뺀 아기를 조산사님이 받아 내 배 위에 올려주셨다.


“집에서 낳을 애가 아니야. 너무 커”

 남편은 울고 나는 웃고 조산사님은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그렇게 새 생명이 탄생했다.


 잠시 후 남편이 밥상을 봐왔다. 진통을 느끼며 내 손으로 끓인 미역국이 내 앞에 한 대접 놓였다.

 ‘내가 살아 너를 먹는구나’

 긴 시간 진을 뺀 조산사님과 남편은 우적우적 밥을 먹는데 나는 영 입맛이 없었다. 미역국 국물을 절반 정도 먹어내는 것도 힘들었다. ‘어쨌든 살았다.’ 황홀하지 못한 출산이었지만 나도 살았고 아기도 살았다.


 아기는 딸이었다. 태어나느라 고생한 아기에게 ‘이담에 넌 아기 낳지 말아라’하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 먹었다. 수천 년 인류 역사에 탑 시크릿을 알게 되었지만 어머니와 할머니가 그래 왔듯 나도 비밀을 간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쁜 아기를 얻었으니까. 가정 출산이든 제왕절개든 아기를 얻기 위한 방법에는 후회가 없을 테니까.



 


#가정출산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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