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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Jul 17. 2021

(부록) 필리핀 잉글리시 - 1부

(마흔 살에 떠난 필리핀 어학연수)... 부록

언어로 보는 필리핀의 미래: 필리핀 잉글리시의 오해와 진실..(1편)


필리핀에서 쓰는 영어를 ‘필리핀 잉글리시(Philippines English)’라 부른다. 

필리핀은 16세기부터 300년 이상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뒤이어 미국에 48년가량 식민 지배를 당했다. 

미국은 1898년 있었던 '미서전쟁(미국과 스페인과의 전쟁)'의 승리로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양도받았다. 


미국 입장에서 필리핀은 아시아의 중요한 전략 요충지였기에 스페인보다 훨씬 공들여 식민지를 관리했다.

당시 미국은 필리핀을 알래스카나 하와이처럼 한 주(州)로 만들려는 생각으로 영어를 집중적으로 보급했다.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해외 유학을 보내거나 정부에서 좋은 대우로 고용하는 등 스페인어가 자리 잡고

있던 필리핀을 영어 중심의 사회로 변경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필리핀을 2차 대전 말미에 일본이 점령했다. 점령 기간은 약 3년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일본은

필리핀에 큰 영향을 줬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패하여 철수하기까지 많은 수탈과 학살이 있었다. 하지만

점령 기간이 짧았기에 독립에 어려움은 없었다.


당시 다른 동남아시아의 나라들처럼 필리핀 정부는 2차 대전 후 피폐해진 나라를 스스로 끌고 갈 힘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미국의 문화를 비롯한 교육과 정치 시스템을 그대로 받아들여 정부를 수립했다.  

미국으로부터 식민지 생활을 한 적이 있었고, 종전 후 점령군이 미군이었기 때문에 이건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런 배경 덕분에 일상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필리핀에는 ‘타갈로그어’라는 자국 표준어가 있다. 

수도 마닐라가 있는 루손(Luzon) 섬 지방에서 사용하던 지역 언어를 필리핀 표준어로 정한 것이다.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영어도 타갈로그어 못지않게 많이 사용된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는 안내문이나 

간판, 홍보용품 등은 대부분 영어를 사용하고 신문, 잡지를 비롯한 관청의 공문서도 타갈로그어보다는 

영어를 더 많이 쓴다. 서점에 가보면 대부분의 잡지나 소설들이 영어로 발행되고, 영미권의 잡지나 책들은 

원문 그대로 출판된다. 따라서 필리핀에서는 영어를 모르면 생활이 어렵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공용어’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이건 자국어가 통일되어 한 가지 언어만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자국어가 통일되어있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이런 일이 생긴다. 

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의 대통령 궁에서 ‘세부 시청’으로 전화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일이 생기겠는가? 통화가 안 된다. 마닐라에서 쓰는 말과 세부에서 쓰는 말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로 치면 청와대에서 부산 시청으로 전화를 하면 말이 안 통한다는 뜻이다. 우스워 보이지만 현실이 

그렇다. 이러니 공용어가 없으면 행정업무 진행이 안 된다.  


기업의 경우, 마닐라의 본사가 세부에 있는 지사로 이메일이나 팩스로 업무 지시를 한다고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쓰는 언어로 쓰면 서로가 못 알아본다. 회사가 안 굴러간다. 


가끔, 한국인들 중 ‘지역 언어’를 사투리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방금 든 예를 ‘과장’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던데, ‘지역 언어’와 ‘사투리’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소위 말해서, “하나, 둘, 셋…. ” 등 헤아리는 것부터 사용하는 단어, 문법까지 다른 말을 사투리라고 할 수는 없다. 사투리처럼 억양과 단어 몇 개를 다르게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필리핀에서의 ‘지역 언어’는 

완전히 다른 나라 말이라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지역 언어가 발달한 나라들은 전국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정해야 하는데, 그걸 ‘공용어(Official Language)’라고 부른다. 필리핀에서는 영어를 공용어로 쓴다. 공문서나 기타 모든 문서는 영어로 작성하고 교과서도 영어로 만든다. 영어를 쓰기 싫어도 쓸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필리핀은 섬이 많다 보니 지역 언어가 많이 발달했다. 

내가 있는 세부만 해도 필리핀 표준어인 ‘타갈로그어’를 쓰는 사람은 없다. 

세부(Cebu, Philippines)에서는 ‘비사야어’를 쓴다. 


“비사야(Visaya)”는 필리핀의 중부지역을 일컫는 말인데 남쪽의 가장 큰 섬인 민다나오(Mindanao)를 

포함해 광대한 지역에서 “비사야어”를 사용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비사야 어’는 필리핀 표준어인 

‘타갈로그어’와 완전히 다른 언어이다. 


필리핀은 기본적으로 TV 방송이나 신문 등을 비롯하여 학생들의 교과서까지 모두 필리핀 표준어인 

타갈로그어로 만든다. 그런데도 현재 필리핀 국민의 타갈로그어 사용량은 약 60% 정도에 불과하다. 

필리핀은 인구가 1억이 넘으니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40% 즉, 4천만 정도의 사람들이 표준어를 쓰지 

않고 지역 언어를 쓴다는 뜻이다. 


참고로, 세부에서 쓰는 ‘비사야어’는 전 국민의 약 30% 정도가 사용한다. 

세부에는 ‘비사야 어’ 신문이 있고, TV나 라디오 방송도 ‘비사야 어’로 제작된다. 따라서 표준어인 

‘타갈로그어’는 세부에서 외국어처럼 받아들여진다. 당연히 마닐라에서는 '비사야어'가 외국어처럼 

받아들여진다. 문자는 라틴알파벳을 사용하지만 서로 대화는 안 된다.


세부 어린이들은 태어나서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가족과 ‘비사야 어’로 대화하고, 학교에 가면 

‘영어’와 ‘타갈로그어’로 된 교재로 수업을 받는다.  집에 오면 TV나 방송은 모두 타갈로그어로 나오니 

아이들은 비사야어로 엄마와 이야기하면서 타갈로그어 TV를 보고 영어로 숙제를 한다. 그리고 대부분 

케이블 TV에서 영화는 자막 없이 방영된다. 이렇다 보니 아이들은 본의 아니게 3개 언어를 동시에 배운다. 


필리핀에는 우리나라와 개념이 조금 다른 국제학교와 사립학교들이 있다. 

이 학교들은 영어로 수업을 한다. 상대적으로 공립학교들은 지역 언어로 수업하는 곳이 많다. 

대학의 경우는 대부분 영어로 수업을 하고 리포트나 시험도 영어로 치른다. 교수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지역 언어로 강의를 하는 교수도 있다고 하는데, 영어 수업을 기본으로 한다. 교수들도 영미권에서

유학한 사람이 많아서 수업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럼 모든 필리핀 사람들이 다 영어를 잘하냐?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여행을 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필리핀 사람 중에는 영어를 못 하는 사람도 많다. 

한국인은 한 가지 언어만 사용하기 때문에 모국어를 잊어먹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말은 안 쓰면 

잊어버린다. 필리핀 사람의 경우 어릴 때부터 여러 종류의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지만, 성인이 되면 

사용언어가 지역 언어로 한정된다. 그러니 실생활에 사용하지 않는 언어는 자연스럽게 잊어먹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평범한 세부(Cebu)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고등학교까지는 영어로 공부를 했으니 어릴 때는 당연히 영어를 잘했을 것이다. 그럼 졸업 후에는 

어떻게 될까? 일상에서는 문서를 제외하면 대화는 모두 지역 언어로 한다. 아무래도 영어를 쓸 일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평범한 사람이 학교를 졸업하고 영어를 쓰지 않는 직장에서 3년 정도를 일했다면? 

자기가 알고 있는 영어 단어의 상당 부분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도 시간은 

좀 더 걸리겠지만 결과는 비슷할 수밖에 없다. 영어로 된 영화나 책 혹은 신문, 인터넷 콘텐츠를 자주 

보는 사람은 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어려운 영어 단어에서부터 서서히 머릿속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어릴 때 배운 게 있으니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않겠지만 유창하게 쓰기는 어렵단 뜻이다. 


이래서 필리핀 사람 중에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직업군에 있는 사람들은 영어 실력이 현저히 줄어든다. 

그건 나이가 많아질수록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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