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랑끝 Jul 18. 2021

(부록)필리핀 잉글리시 - 2부

(마흔 살에떠난 필리핀 어학연수)... 부록

언어로 보는 필리핀의 미래: 필리핀 잉글리시의 오해와 진실..(2편)


많이 사용되는 단어나 문장은 언어의 유행을 만든다. 

필리핀 사람들도 자주 사용하는 영어단어와 문장들이 있다. 

이것들이 필리핀 말과 조금씩 결합하면서 ‘필리핀 잉글리시’라는 것이 생겨났다. 


언어가 바뀌는 것에는 발음도 크게 한몫한다. 

필리핀 말에는 특유의 딱딱한 발음이 있는데, 이것이 영어 발음과 만나서 

필리핀 잉글리시 특유의 발음이 생긴다. 


'필리핀 잉글리시'는 현재 필리핀 사람들이 많이 쓰고 있는 영어를 말한다. 

일종의 영어 방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형태의 언어 변화는 영미권의 

다른 나라들도 똑같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영국, 미국, 호주, 캐나다, 

아일랜드, 남아공 등의 말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 필리핀 잉글리시도 그런 맥락으로 보면 된다. 


가끔 어설픈 영어 사대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영국, 미국을 제외한 지역에서 발달한 

영어를 깎아내리는 것을 볼 때가 있다. 그건 뭘 몰라서 그렇다. 그들은 말과 글을 

헷갈린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말’이 변한다고 ‘글’까지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말은 대화에 사용되지만, 글은 교육과 기록 및 창작에 사용된다. 말에서 사용되는 

발음이나 억양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지만 글로 된 콘텐츠들은 문법과 

단어가 거의 변하지 않는다.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국가에서는 기본적 언어 

체계가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도 각 지역에서 사투리를 쓰지만, 

글을 쓸 때는 사투리로 쓰지 않는 것과 같다. 


필리핀도 학교나 학원 같은 교육기관에서는 제대로 된 수준 높은 영어를 가르치고, 

대학에서는 영어로 논문을 작성하기 때문에 영어 콘텐츠는 많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영어로 된 학문적 분야는 한국보다 필리핀이 훨씬 세계교류가 쉽다는 뜻이다. 


필리핀에서 대학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영미권으로 진학을 할 때, 

영어 수업에 대한 부담감은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러니 필리핀 현지에서 발음이 

안 좋거나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쓰는 영어를 보고 ‘필리핀 잉글리시’를 

깎아내리면 안 된다.  


한국에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온 학생들이 필리핀 

대학생이나 일반인들이 영어를 못한다는 소리 하는 것을 자주 본다. 웃기는 건 

실제로 ‘평범한 필리핀 사람’과 ‘영어 원어민’ 그리고 ‘한국 학생’ 이렇게 삼자가 

대화를 하면 한국 학생들은 한 마디도 끼어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영어 원어민들 역시 한국 학생보다 필리핀 일반인들과의 대화를 훨씬 편해한다. 

이건 내가 현장에서 많이 겪은 일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필리핀 일반인“은 

적어도 고등학교 이상을 졸업한 사람을 말한다. 


필리핀에는 가난으로 고등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들은 

초등학교 수준의 영어만 배우다가 멈춘다. 그들은 실생활에서 영어를 쓸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갈수록 영어 실력이 줄어들어 결국 영어로 대화가 어려워진다. 


필리핀에 자유여행(배낭여행)을 많이 한 사람들은 공통으로 이런 말을 한다.  

“야!, 필리핀 어학연수 그거 미친 짓이야. 거리에서 사람들 만나봐 영어도 못 해. 

발음도 이상하고 내 말도 못 알아들어.”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런 자유여행객들이 만나는 필리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아마도 택시기사나 보트 맨 혹은 지프니 기사, 시장 상인, 술집 종업원 정도였을 것이다. 

이들은 필리핀에서 가장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본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밖에 없으니 모든 필리핀 사람이 “영어를 못한다.” 

혹은, “영어를 이상하게 한다.”고 한다. 원래 인간은 자기가 본 것만 믿는다. 


만약, 여행객이 필리핀의 대학생이나 학교 선생님, 사업가, 큰 회사의 셀러리맨, 

공무원 등과 조금만 교류를 해도 그런 소리는 못 한다. 그들은 호텔 로비에서 만난 

캐셔나 매니저, 벨보이에 대해서는 모두 잊고 있다. 큰 리조트의 경우 하우스키퍼

(청소부)까지 모두 영어를 잘한다. 


제대로 교육받고 성장한 필리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영어를 잘한다. 

바꿔서 이야기하면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당연히 영어를 못한다. 이건 ‘공용어’로 

영어를 쓰는 나라의 한계이다. 


현지인들은 타갈로그어 책보다는 영어책을 많이 본다. 

왜 그러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대답은 이랬다.  


“어릴 때부터 영어로 된 책들만 접하다 보니 영어에 거부감이 없고, 

인터넷에는 영어 콘텐츠가 훨씬 풍부하기 때문에 굳이 타갈로그어 콘텐츠를 찾을 이유가 없어요.” 


지인 중에 컴퓨터를 전공한 공과대학교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 쪽의 콘텐츠를 바로 흡수할 수 있는데 굳이 ‘타갈로그어’ 콘텐츠를 찾을 필요가 없잖아요. 

그리고 타갈로그어로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도 없어요.” 


이러니 자연스럽게 필리핀어 콘텐츠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타갈로그어로 유튜브 콘텐츠를 찍었다고 생각해 보자. 필리핀 내에서도 루손(Luzon) 지역 

이외의 지역 사람들은 안 본다. 그럼 ‘비사야어’로 찍었다면? 필리핀 사람의 70%는 안 본다.  

그런데 학교에서 배운 영어로 찍으면? 전 세계 몇십억의 인구에게 노출이 된다. 누가 영어가 

되는데 자국어로 만들겠는가.   


여기서 잘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필리핀에서는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영어를 잘하고 영어 콘텐츠를 접할 기회도 늘어난다. 

이것은 언어가 사회적 계급 문제로 연결된다는 뜻이다. 내가 필리핀 세부에 살면서 받았던 문화 

충격 중 하나는 필리핀 상류층 사람들은 가족 간에도 지역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애들은 지역 언어를 쓰려고 하는데 부모들은 되도록 그걸 막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용 언어로 계층 구분을 하는 것이다. 


경제적 귀족인 상류층에서는 자기들끼리 되도록 영어로 대화를 하려 하고, 

아이들은 모두 ‘국제학교’급의 사립학교에서 교육한다. 대부분 아이는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하면 영미권으로 유학을 하러 가고 웬만하면 돌아오지 않는다. 


상류사회에서는 그 정도 뒷바라지할 정도의 부는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용 언어가 계급 격차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필리핀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필리핀 상류층은 외국인들을 거지로 생각해. 그건 한국인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진짜 부잣집 애들, 특히 여자애들은 한국인 남자친구 생기면 부모들이 못 만나게 해. 

거지들 집에 들이면 안 된다고.” 


여행객들이나 잠깐 머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필리핀에는 외국인 특히, 한국인을 출입제한하는 

공간이 있다. 대부분이 지저분하게 노는 한국인들 때문이지만, 그중에는 상류층들이 그들만의 

리그에 들이기 싫어서 막는 곳도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부(富)”가 계급을 나누는 상징이다. 

필리핀도 자본주의 사회니 이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필리핀에는 ‘언어’라는 또 다른 계급의 

기준이 있다. 이건 정권이 바뀌고 체제가 바뀐다고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이 그렇게 

굳어졌고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각인되어 있다. 


필리핀에서는 교육이 짧은 사람은 영어를 능숙하게 사용하기 힘들다. 구조적으로 그렇다. 

그러니 ‘공용어’ 시스템을 계속 가져가면 기득권자들은 그들의 자리를 유지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옛날 한국에서 양반들이 ‘한자’를 사용했던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결국, 이런 방식의 언어 사용은 상류계층이 문화적 귀족 생활을 유지하는 사회적 방어막을 

형성하는 셈이다.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고급과 하급의 언어를 구분하고, 하급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사회적 계급을 뛰어넘는 일을 두려워하게 된다. 


나는 필리핀에서 영어를 잘하고 가난한 사람은 봤지만 부자가 영어를 못하는 경우는 못 봤다. 

필리핀의 이런 언어 시스템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평범한 외국인인 

나의 눈에는 필리핀은 미래가 없어 보인다.  


나는 사회학자도 아니고 언어학자도 아니다. 필리핀에 평범한 이민자로 살면서 본 시스템에 

대한 나의 견해가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말이 아름답고 논리적인 언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말과 문자는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한다고 믿는다. 


이 세상에는 풍부한 형용사로 아름다운 문장을 만드는 언어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또한 논리적으로 문장을 구성해서 학술 논문을 쓸 수 있는 언어도 그리 많지 않다. 

그중에서도 문학작품과 학술논문을 동시에 생산할 수 있는 언어는 현재 지구상에 

별로 없다. 


21세기가 되면서 인터넷 문화 콘텐츠의 발달과 함께 ‘우리 말과 글’은 이미 우수한 

언어로 세계 속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우리말은 영원히 강건하게 

발전해 나갈 것이다. 나는 우리 말과 글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큰 행복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말을 자랑스럽게 한다.  


“세종대왕님 감사합니다!!!”  


글을 마치며 몇 개의 문구가 떠올라 적는다.  

이런 문장들을 우리 고유의 말과 글로 읽고 쓸 수 있고, 느낄 수 있어서 너무도 기쁘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유안진)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도종환)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만해 한용운)




(필리핀 잉글리시 끝...)

이전 21화 (부록) 필리핀 잉글리시 - 1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