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도리 사워(Midori Sour)'를 아시나요?
'미도리 사워(Midori Sour)'라는 칵테일이 있다. 내가 아는 유일한 칵테일 중 하나다.
'핑크 레이디', '오르가슴', '블로우 잡' 같은 자극적 제목의 칵테일이나 제임스 본드가
마시는 '마티니'는 이름은 안다. 하지만 맛은 모른다. 근데 '미도리 사워(Midori Sour)'는
맛을 안다. 그건 이 초록색 칵테일에 특별한 기억이 있어서이다.
세부에서 가이드 일을 할 때였다.
자유여행을 담당하고 있다가 패키지(단체 손님)로 복귀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일이다.
여자 손님 두 명을 맡게 됐는데 삼십 대 초반의 보기 드문 미인들이었다.
둘 중 키가 큰 쪽이 피부색이 너무 까무잡잡해서 꼭 외국인 같은 느낌이었다.
헤어스타일도 당시 한국 여성들과는 좀 달랐고 의상도 꽤 파격적이었다.
난 공항에서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나디아'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옷을 비슷하게 입어서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첫날 간단한 일정을 마치고 다음날 아침에 호텔로 픽업을 갔더니 나디아 혼자 아침을
먹고 있었다. 친구는 전날 술을 많이 마셔 아직 자고 있다고 했다. 나는 테이블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한국에서 대학을 다녔고, 베트남에서 최근 6년 정도
직장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국적이 한국이 맞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하며 웃었다.
그럼 혹시 부모님 중에 한 분이 외국분이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라고 했다.
자기는 피부색이 검은 편이라 그런 말을 많이 듣는데 부모님은 다 토종 한국분이라고,
어릴 때 외국에 살아서인지 한국 발음이 살짝 꼬이는 게 있어 그런 소릴 자주 듣는다고 했다.
휴양지 리조트의 야외 식당에서 홈드레스를 입은 현지인 풍(?) 아가씨가 중년의 한국 남자와
식탁에 마주 앉아 있는 장면은 그리 건전한 느낌이 아니다. 그래서 생각 있는 가이드라면
여자 손님과 단 둘이 테이블에 앉지 않는다. 아침 식사 시간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절대
해서 안 되는 행동이다. 하지만 그날 아침 나는 그런 걸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그날 저녁, 일정이 끝나고 헤어지는데 이 아가씨들이 슬쩍 이런 말을 한다.
"저녁에 혹시 나가서 한 잔 해도 될까요?"
"두 분만 나가는 건 좀 위험할 거 같은데요. 내일 새벽 일정도 있고."
"이렇게 호텔에만 있으면 아쉬울 거 같아서요."
"음... 그럼 제가 8시쯤 데리러 올게요. 함께 가시죠."
"어디 갈만한데 있을까요?"
"가까운 클럽 같은 데 가서 간단하게 한 잔 하시죠. 괜찮으시면"
"네, 그럼 그때 봬요. 고맙습니다."
그날 밤 이 둘과 함께 막탄에서 그나마 제일 낫다는 클럽으로 밤마실을 나갔다.
마침 주말이라 현지인 대학생들과 젊은이들이 많아 클럽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내가 테이블을 잡고 맥주를 몇 병 시켰더니 이 아가씨들이 "잠시만요" 하더니
메뉴를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잭 다니엘(위스키)' 한 병을 더 시켰다.
"이거 다 마실수 있어요? 킵하기도 어려울 텐데" 했더니,
"남으면 가져가죠 뭐." 이러며 웃는다.
손님들과 클럽을 가면 나는 주로 멀리 떨어져서 감시만 한다.
같이 놀 능력도 안 되지만 이런 분위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두 사람은 지칠 줄을 몰랐다.
12시가 넘고 1시가 넘었는데도 갈 생각을 않고 흥이 끝까지 올라 있었다.
게다가 맥주와 '잭 다니엘'을 다 비우고도 위스키 한 병을 더 시킬 태세였다.
사실 그날 클럽에서 DJ와 손님들이 둘을 거의 여신급 대우를 하는 바람에 그녀들
주위에는 온통 사람들이 몰려있었고, DJ가 데크 위로 끌고 올라가 춤까지 추게 하는
통에 물 뿌리기까지 시전 하며 아주 난리가 났었다.
새벽 3시가 지날 무렵 도저히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어 두 사람을 억지로 끌고 나왔다.
아침 6시에 '오슬롭'으로 남부 투어를 떠나야 하는데 이건 뭐 어떻게 감당을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온 거였다. 아쉬워하는 둘을 호텔에 집어넣으니 새벽 4시가 넘어 있었다.
세부에서 가이드 일을 10년 이상했는데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를 나는 이 날 했다.
다음 날 아침 6시에 스케줄이 있으면 집에 가지 말고 호텔 주차장에서 잤어야 했는데,
그날은 무슨 생각이었는지 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침 7시에 눈을 뜬 것이다.
엄청난 양의 전화와 문자가 와 있었고 이미 뒷수습을 할 수 없는 사태에 이르러 있었다.
7시 30분쯤 호텔에 도착해 방으로 전화를 했더니 나디아가 어두운 표정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화를 내지는 않았다.
"어쩌겠어요, 저희도 겨우 일어났는데 주차장에 오니 아저씨가 안 계신 거예요.
전화도 안 받고 해서 그냥 올라가서 다시 잤어요." 이렇게 간단히 말했다.
그런데 그리 원망하는 눈초리는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든 다른 방법으로 보상하겠다고 하고 일단 더 쉬고 점심 식사
시간에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나디아와 대화 중에 회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손님이 가이드 변경 요청을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는 것이었다.
서울 본사로부터 온 컴플레인이니 꽤나 큰 문제가 된 것 같았다.
나디아에게 물었더니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슥하더니,
"아마, 친구가 서울에 가이드 변경 신청을 했나 봐요. 죄송해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알았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오후 다른 가이드에게 팀을 넘기고 회사에 가서 경위서를 쓰고 꽤 많은 문책을 당했다.
그리고 내겐 근신 조치가 내려졌다.
옆에 있던 동료들이 경위서를 쓰고 있는 날 보며 이랬다.
"어째, 너무 예쁜 애들이 손님으로 왔더라니... ㅋㅋㅋ"
다음 날 집에 콕 처박혀 꼼짝도 않고 있는데 저녁 늦게 전화가 왔다.
"혹시 지금 공항 근처에 계세요?" 나디아였다.
"아뇨, 왜요?"
"저희, 오늘 가는 날인데 잠깐 뵙고 싶어서요."
"안 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친구는 마사지 중이에요. 저는 아저씨 잠깐 보려고 마사지 안 받는다고 했어요."
"왜요?"
"아저씨한테 할 말도 있고, 첫날 못 갔던 다리 옆의 루프탑 바도 가보고 싶고 해서요."
"음~~, 거긴 담당 가이드하고 가면 될 거 같은데"
"아저씨가 제 담당 가이드잖아요."
"저, 잘렸잖아요."
"그러지 말고 루프탑으로 오세요. 시간도 얼마 없는데."
"왜 만나려는지 물어봐도 돼요?"
"오시면 말씀드릴게요."
"담당 가이드 좀 바꿔 주세요."
이렇게 해서 나는 '막탄 뉴브리지'가 잘 보이는 루프탑 바에서 그녀를 만났다.
건물에 도착하니 입구에 나 대신 팀을 맡은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이 꼭 형을 다시 보고 싶다 그러네."
"왜? 또 무슨 일 있었냐?"
"아니, 말은 안 하는데 나쁜 일은 아닌 거 같아서 데려왔어."
"알았어"
"형, 한 시간도 안 남은 거 알지?"
"알아, 빨리 끝낼게. 고맙다"
나디아는 첫 날 봤던 그 특이한 옷을 입고 야경이 잘 보이는 바에 앉아 있었다.
내가 옆에 앉자 웃으며 내게 뭘 마시겠냐고 물었다.
내가 '산미겔 라이트'(맥주)를 시키자 내게 이런다.
"오늘은 이거 드셔 보세요. 제가 사 드리는 거예요."
"저, 술 잘못 마십니다."
"독하지 않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리고 저한테 이제 말 놓으셔도 돼요."
"그래도 그건 아닌 거 같습니다."
"아뇨, 이제 그러셔도 돼요. 일 다 끝나셨잖아요."
그러고는 바텐더에게 뭔가 주문을 했다.
그녀는 붉은색이 도는 칵테일 잔을 빙빙 돌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내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난 빛나는 뉴브리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어 줬다.
잠시 후 내 앞에 이슬 방울이 맺힌 초록색 칵테일 잔이 놓였다.
"이거, 뭔지 아세요?"
"글쎄, 칵테일은 아는 게 없어서"
"'미도리 사워'라고 하는 칵테일이에요."
"일본 술인가 보네."
"'미도리'가 일본말로 '초록(녹색)'이라는 뜻이래요."
"음, 근데 나한테 이걸 왜?"
"색이 참 예쁘지 않아요?"
"예쁘네"
"맛도 좋아요. 한국에 요즘 여자애들이 전부 이것만 마셔요"
"그럼 여자 술인 거네"
"술에 그런 게 어딨어요. 그냥 맛있으면 마시는 거지"
"색이 예쁘긴 하다."
"첫날 여기 지날 때 옥상에 멋진 바가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아마?"
"그 말 듣고 꼭 한 번 와보고 싶었어요."
"그럼, 담당 가이드하고 같이 오지."
"아저씨가 담당 가이드잖아요."
"그거, 참 애매하네."
"회사에서 많이 혼나셨죠."
"뭐, 혼날 짓을 했으니까."
"한국 가기 전에 아저씨한테 한 잔 사고 싶었어요."
"왜?"
"ㅎㅎㅎ"
"왜 웃어?"
"전, 아저씨가 다른 가이드들하고 뭔가 좀 다른 것 같아요."
"내가? 왜? 뭐가?"
"저, 베트남에서 일했다고 했잖아요. 그때 저도 여행사에서 꽤 오래 일했거든요.
그래서 가이드들을 많이 알아요. 지금 같이 온 친구도 그때 알게 된 친구예요."
"음~, 그랬구나. 그래서 본사에서 그렇게 빨리 컴플레인이 처리됐구나."
"우린 아마 한국에 돌아가면 여행 경비 환불받지 싶어요."
"그렇게 되겠지"
"아저씨 징계 꽤 크게 받으실 거 같은데, 어때요?"
"2주일 정도, 길면 3주"
"죄송해요"
"나한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니에요. 정말 미안해요. 전 친구가 본사로 바로 전화할지 몰랐어요."
"그럴만했으니 한 거지. 괜찮아, 내가 잘못한 건데 뭐"
"전, 아저씨가 참 멋있어 보여요."
"왜~?"
"일단 말을 멋있게 하시잖아요."
"내가?"
"(ㅎㅎㅎ) 네, 여자들 좋아할 말 잘하세요.
아침에 식당에서 커피 마실 때 좋았어요. 그런 기분 오랜만이었거든요."
"그래?"
"그리고 우리 클럽에서 놀 때 정말 감동이었어요."
"뭐가?"
"'로컬 가드'들한테 팁 막 뿌리면서 우리 옆에 이상한 놈들 못 오게 막아주셨잖아요.
그리고 바에 계속 앉아서 몇 시간 동안 지켜봐 주시고"
"음~~, 그건 다른...~~"
"일이니까 그랬다는 거 알아요. 다른 손님들 한테도 다 그러는 것도 알고"
"........"
"그래도 멋진 건 멋진 거예요. 아마 아저씨가 조금만 잘 생겼어도,
저 오늘 비행기 안 탔을 수도 있는데~."
"잉~~?, ㅎㅎㅎ"
"ㅎㅎㅎ... 죄송하기도 하고 그냥 가면 섭섭할 거 같아서, 꼭 한 잔 사고 싶었어요."
"난, 괜찮아 10년 넘게 한 번도 이런 일 없었는데, 이제 은퇴할 때가 됐나 봐."
"그건 알아서 하시고요."
"ㅎㅎㅎ..."
" 이 칵테일 저하고 참 비슷하지 않아요? 상큼하니?"
"(으잉?~) 전혀 아닌데~"
"정말요? 왜요?"
"그냥, 그건 아닌 거 같아. (나디아는 상큼한 스타일은 아니야)"
"칵테일이 별론가 보네"
"아냐, 맛있어 정말이야. 근데 뭔가 느낌이 좀 달라."
"뭐가 다르다는 거예요?"
"........."
우리는 10분쯤 더 대화를 하고 헤어졌다.
물론, 그 후로 한 번도 연락을 해 본 적은 없다.
그 뒤 난 종종 혼자 그 루프탑 바에 가서 메뉴에 있는 칵테일을 하나 씩 마셔 봤다.
솔직히 술맛을 모르니 전부 그게 그거 같았다.
하지만 유독 '미도리 사워'는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녹색의 액체를 테이블 위에 놓고 맺힌 물방울을 볼 때면 괜히 웃음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메뉴의 순서대로 칵테일을 시켰을 때였다.
내 앞에 언젠가 본 듯한 익숙한 잔이 놓였다.
나는 그 칵테일이 그녀가 날 기다릴 때 마시던 것이었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 붉은색 액체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본인이 어떤 느낌인지 정말 몰랐을까......"
그녀의 칵테일은 이거였다.
(끝)